소소한데 우주적인 에세이
제목을 보고 ‘아재 냄새’가 난다고 뭐라 할 수 있겠지만 나와 주변 지인의 특징이니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냥 그렇단 거다.
마흔 하고도 두 해를 더 살면서 나일 먹는 게 그리 싫진 않았다. 이십대는 불안했고, 삼십대도 불안했다. 그게 너무 싫었는데 마흔이 넘어도 안정은 개뿔, 불안한 건 똑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감정에 대한 태도다. 불안이란 감정을 받아들이게 됐단 거다.
마흔이 넘으면 이불킥도 잘 안하게 된다. 노력과 열정을 기울여도 배은망덕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소싯적 피가 뜨거웠을 때는 어떤 식으로든 되갚아주지 않고는 못 배겼다. 이제는 혼자 조용히 화를 내거나 자거나 그냥 참거나 그러다 잊어버린다.
이렇게 된 것은 홀로 감정 수양을 해서가 아니라 나로 인해 다른 누군가는 이불킥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감정의 가해와 피해는 언제나 처지와 상황에 따라 뒤바뀔 수 있을 테니. 내가 감정적 가해자의 경우가 더 많을 수 있다는 것을 나이와 연차가 쌓이니 알게 됐다.
그래서 사십대는 주변일랑, 사람일랑 신경도 안쓰는 무뢰배 같지만 알고 보면 더 수줍다. 수줍어서 그렇다.
나이가 들면서 작정한 건 후배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말을 작작하자는 것이다. 말 많은 아재가 되고 싶지 않은데, 자꾸 말이 는다. 그게 또 라떼처럼 비쳐질까봐 말을 삼킨다. 그렇게 다시 수줍은 아재가 된다.
사십대는 멋도 모르는 줄 아는데 안 그렇다. 이십대, 삼십대보다 거울도 더 자주 본다. 기미가 생겼는지 흰머리는 없는지 외모에 관심도 많지만, 안 그런 척 할 뿐이다. 수줍기 때문이다.
사십대는 이기적이라고 하는 데 이것도 모르는 소리다. 반짝이는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려다 훼방만 놓을까 싶어 주춤하는 속내를 몰라서다. 구닥다리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니, 라떼 소릴 듣고 싶지 않아 잠자코 있을 뿐이다.
이러니 사십대가 수줍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