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아침 3부작①
PTSD는 전쟁·고문·자연재해·사고 등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후 그 사건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고, 사건 후에도 지속되는 재경험으로 고통을 겪게 되는 정신질환이다. 재난 현장과의 물리적 거리는 PTSD 발병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일례로 2001년 9월 11일 오전 9시 37분 테러범들이 납치한 아메리칸항공 AA77편이 미국 워싱턴의 국방부 펜타곤에 충돌한 직후, 펜타곤과 가까운 지역 주민들일수록 PTSD 증상이 더 높은 것으로 보고됐다. 통상 PTSD는 사건이나 사고를 당한 피해자 및 가까운 지인에게 주로 발생한다. 세월호 참사를 주변에서 지켜보거나 도움을 준 사람들도 PTSD 증세가 나타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국어사전은 참사(慘事)를 ‘비참하고 끔찍한 일’로 정의한다.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을 뜻하는 사고(事故)보다 몇 단계 위다. 세월호는 참사다. 세월호 참사를 ‘진도 여객선 사고’나 ‘선박 침몰 사고’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한국 사회의 부조리와 인재에 기인한 비참하고 끔찍한 참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월호는 숱한 이들의 가슴에 멍을 남겼다.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을 비롯해 참사를 접한 이들의 가슴에는 크기만 다를 뿐 아직 선명한 피멍이 남아있다.
세월호 참사 8주기를 맞아 사흘동안 <비극의 아침> 3부작을 전한다. 3부작은 세월호 침몰 사흘째 당시 실종자 가족들이 머물던 진도실내체육관의 반나절을 기록한 르포르타주이다.
아침이 밝았다. 진도 해상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된 지 사흘째 아침이었다. 실종자 가족의 임시 거처가 마련된 진도실내체육관까지 가는 길은 산으로 둘러싸인 여느 시골길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체육관에 오르는 길 어귀마다 일정간격을 두고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다. 구급차와 보도차량은 바쁘게 도로를 오갔다. 한적한 시골 마을의 아침은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2014년 4월 19일 새벽, 목포에서 진도행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국내외 취재진의 모습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진도로 가는 첫 차는 6시15분. 버스 안은 이른 시간임에도 만원이었다. 이 중 상당수의 목적지는 진도실내체육관이었다.
체육관까지는 걸어서 10분. 카메라 가방과 취재수첩을 든 이십대 남성이 부산을 떤다. 그는 자원봉사자들에게 질문을 퍼붓고 이를 적는다. 한 시간 뒤 체육관 입구에서 다시 마주친 그는 넋이 나간 얼굴로 서 있었다.
진도실내체육관의 내부는 단순하다. 1층은 경기장, 2층은 관람석으로 이뤄져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다녀간 후 설치됐다는 대형화면에서는 뉴스가 쉴 새 없이 방영됐다. 실종자 가족은 주로 1층에 돗자리와 종이박스 따위를 깔고 쪽잠을 잤다. 이들이 덮고 있는 이불은, 이들이 처한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온통 알록달록하다. 일부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고 울고, 또 다른 이는 갈라진 목소리로 통곡을 하고 있었다.
취재진이 모여있는 관람석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 중년의 여자가 빨대를 물고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눈두덩이는 퉁퉁 부어있었다. 눈은 이미 붉게 충혈된 상태다. 그는 하릴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시선 끝 어디에도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여인은 바다를 찾고 있었다. 아직 아이가 바다 속에 있었다.
허구헌 날 저렇게 울어. 아무것도 안하고
옆 자리 실종자 가족이 핀잔을 줬다. 체육관에서 쪽잠을 잔지 며칠, 다들 얼굴이 누렇게 떠 있다. 생기란 찾아볼 수 없다. 핀잔을 준 이가 자리를 뜬다. 체육관 입구에서 나눠주는 간식거리 한 봉지를 들고 와 우는 이에게 안겨준다.
“먹어야 힘이 나지.”
2층 관람석에서 중년남성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인이 남자를 툭 친다. “왜 여기서 자고 있어? 밑에 가서 좀 누워” 남자는 대꾸 없이 손을 젓는다. 여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됐긴 뭘 돼. 따라와.” 소매를 잡아끌자 남자는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선다. 실종자 가족들은 단지 기다릴 뿐 이곳에서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 잠자는 모습을 가족에게 보이기 싫은 가장의 자존심과 바닥난 체력은 그를 2층 구석으로 이끌었으리라.
취재진이 모여 있는 2층도 난장판이었다. 돗자리를 깔고 아직 잠에 취해있는 이도 여럿.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이도 눈에 띄었다. 단정히 머리를 빗어 넘긴 기자의 손이 바쁘다. 그는 자판을 두드리는 중간 연신 휴대전화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데스크의 메시지가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기사를 내놓아라’는 재촉이었다. 그는 식판에 아침 식사를 들고오는 후배에게 한차례 신경질을 내고는 다시 노트북에 집중했다.
배낭에서 새 양말로 갈아 신은 다른 기자도 휴대전화를 확인하고는 곧장 노트북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 옆에는 방송국 로고가 새겨진 재킷 차림의 남자기자가 카메라 앞에 섰다. 그가 리포트를 시작했다.
“실종자 가족들은 생존자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쑥한 슈트 차림의 방송기자도 방송 준비에 한창이다. 사실 그가 이곳에서 얻은 정보란 많지 않지만, 시간에 맞춰 현장 중계는 꼬박꼬박 이뤄져야 한다. 남자는 관람석 의자위에 신발을 신고 올랐다. 1층 실종자 가족의 모습이 남자 뒤에 깔린다. 그림이 좋다. 남자가 올라선 의자의 바로 아래에 박스를 깔고 잠든 이들이 있었다. 이 광경을 외신기자가 촬영하고 있었다.
체육관 입구. 각종 단체에서 마련한 급식소가 줄지어 있다. 식사를 마친 남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무슨 현장 중계를 하라는 거야.” 수화기 너머 어떤 대꾸가 돌아왔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남자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진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남성이 입은 재킷에 방송사의 로고가 반짝거린다.
“이렇게 많아도 이게 오후 되면 물건이 없어요.” 구호 물품 책임자로 보이는 양복 차림의 사내가 묻자 파란색 조끼를 입은 남자가 신경질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구호물자는 쉴 새 없이 들어오고 그만큼 소비된다. 밥솥은 쉬지 않고 쌀을 삶는다. 실종자 가족들, 경찰, 취재진, 자원봉사자 모두 밥을 먹는다. 스테인리스 쟁반위 일회용 그릇에 밥과 국, 반찬이 담긴다. 오늘은 우엉국, 김, 겉절이, 멸치다. 후식은 바나나와 쌍화탕.
진도의 아침은 아직까지는 조용했다. 오전 10시 해양경찰의 공식브리핑이 있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