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2살에 결혼을 했다. 처음 여자로서 엄마를 생각하게 된 시기였다. 그전까지는 엄마는 ‘엄마’ 자체로 존재했다.
어떠한 ‘엄마’ 정도였던 듯하다.
너무 무섭고, 엄하고, 조금은 냉정하고 밥과 맨날 돈밖에 모르고 돈 때문에 사람들과 악쓰며 싸우고 아빠가 돌아가시고 같이 외식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어쩌면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는 크게 관심 없으시면서도 남들 눈치는 매우 보시고 엄마의 미래만 몰두하시는 그런 엄마.
32살이 되던 해 결혼을 앞두고 양가 부모님에게 각각 결혼 축하금인지 준비자금인지 300만 원씩 받았다. 결혼식에 큰 로망이 없었던 터라 결혼식 자금은 최소한으로 그 대신 신혼여행을 미국 라스베이거스와 LA로 정했다.
4월 28일 결혼식을 한 후, 신혼여행은 자리 이제 잡아가는데 그 긴 시간 동안 체육관을 비우는 것은 안 된다고 큰 관장님의 반대로 추석 명절로 날짜를 바꿔 예약한 비행기표를 날렸다. 그 일로 너무 속상해하고 있던 때 친정에 갔다가 엄마랑 대화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래도 숙아,, 네가 벌써 32살이네. 언제 다 커서 결혼도 하고.. 이제 엄마는 걱정이 없다.” 그러면서 손등을 쓰다듬으실 때 엄마 나이를 계산하게 된 것이다.
나와 23살 차이가 나는 우리 엄마. 어느 순간 어무이로 부르는 우리 엄마. 엄마가 교통사고가 나서 1년을 병원에 누워계셨던 나이가 32살이다. 그리고 무릎의 뼈들이 다 부서져 어쩔 도리없이 뼈가 부서진 채로 둬야 해서 그대로 붙어 무릎을 굽히지 못하게 된 때, 그리하여 장애인이 되어야 했던 나이. 32살이었다.
집으로 오는 고속도로에서 문을 열고 소리를 질러대며 울었다.
나와 동시대를 살았다면, 그녀가 나의 자매나 내 딸이었다면, 나는 엄마를 그렇게 보거나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친년, 네가 미친년이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술만 먹으면 이야깃거리가 나의 비관적인 현실에 더해 엄마 생각으로 옮겨갔다. 가슴이 멨다. 그렇게 처음으로 남편과 한 번도 다루지 않았던 엄마와 나, 우리 가족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엄마와 아빠는 사이가 좋다가도 종종 싸우셨는데, 그 강도가 상상을 넘어섰다. 동생과 나는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엉엉 울어대며 우리 둘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싸움이 시작될 때면 칼을 숨기기 바빴다.
동생과 싸운 후였나, 엄마가 칼을 들고 내 앞에 서셨다.
같이 죽자 그러셨다. 무릎 꿇고 싹싹 빌었다. 그러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나가서 못 드시는 술을 드시고 새벽에 들어오셨다.
꺼억 꺼억 안방에서 화장실에서 토악질을 해대시며 서럽게 우셨다. 잠에서 깬 나는 엄마의 모습을 어쩔 줄 모르며 바라봤다.
엄마한테 맞는 게 무서워 기절을 했다. 기분 나쁘다고 문을 쾅 소리 내며 내 방에 들어갔다는 이유였다. 내 나이가 20대 중반 때이다. 동생이 말려서 일단락된 것 같은데 그것도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저 눈을 떴을 때, 엄마와 동생이 놀라서 울며 누워있는 내 얼굴을 몇 번을 쓰다듬으면서 미안하다고 비셨다.
분명 엄마가 했던 행동은 나에게 너무 슬프고 아픈 기억이다.
그러나 순간 이해되는 이상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고통은 동정이 아닌 존중의 대상이다.’ 엄마의 고통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의 현실이 이렇게 죽을 만큼 힘들다 하지만 나는 장애인이 아니었다. 그 몸으로 건사해야 할 어린 자식들도 없으며 내 옆의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나를 잘 이해하고 있고 사랑한다.
32살의 나는 그렇게 처음으로 마음으로 엄마를 이해하려고 시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