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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 Feb 18. 2021

영주 영화 리뷰

나쁘고 좋은 사람 그게 바로 내 모습이다.


영주(2018)  

드라마 한국 2018.11.22 개봉

101분, 12세 이상 관람가

감독: 차성덕

주연: 김향기, 김호정

네티즌 평점: 8.2

- 다음 영화 참조 -


평소 사람을 판단할 때 좋은 사람 아니면 나쁜 사람 이렇게 구별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현실에 사람은 흑과 백으로 따로 존재하지 않는구나 알게 된다.


영화감독은 10대 때 교통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가해자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 아픈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


영화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19살 영주는 가해자를 찾아 복수하려 하나 의외로 그들을 좋아하게 된다.


부모에 도움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불의에 사고로 텅 빈 마음을 가진 소녀, 그녀를 지켜보니 먹먹한 삶을 위로해 주고 싶다.


따뜻한 위안이 담겨있는 영화이지만 동시에 마음이 쓰라린다.

이 글은 줄거리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졸지에 가장이 된 19살 영주(김향기)는 하나뿐인 남동생만큼은 책임지려 한다. 그런데 사춘기 남동생은 어긋나가고 사고를 쳐서 소년원에 갈 처지에 놓였다.


합의금 삼백만 원이 필요하다. 영주는 고모에게 부탁하지만 거절당한다. 고모는 말로는 도와주는 척하지만 실상은 자기들 생각뿐이다.


그래도 영주는 대출을 받으려고 여기저기 전화를 한다. 삼백만 원에 선이자 90만 원을 보내면 바로 입금해 준다고 한다.


영주에게 남은 돈 백만 원이 있다. 피 같은 돈 90만 원을 보냈는데 대출 상담 전화는 불통이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더 이상 방법이 없는 영주는 부모님 교통사고 가해자를 찾아가서 돈을 융통해볼 생각이다. 가해자 아저씨(유재명)는 아내 향숙(김호정)과 함께 두부가게를 시장에서 운영하고 있다.


영주는 두부가게에 취직을 한다.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현금을 보관하는 식용유 말통을 알아낸다. 영주는 새벽에 돈을 훔치려고 가게에 들어왔다.


조심조심 겨우 현금을 손에 쥐는 순간 갑자기 가게에 아저씨가 나타났다. 술에 찌들어서 비틀거린다.


그는 자기 실수로 일어난 교통사고에 대한 괴로움으로 술과 담배에 매일 의존한다. 그의 아들은 그날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집에 항상 누워만 있다.


영주를 발견한 가게 아저씨는 영주에게 다가온다. 놀란 영주는 망치를 손에 들고 있는데, 아저씨는 영주를 자신에 아들로 착각했는지 이름을 부르면서 막 운다.


그러다가 그 아저씨는 갑자기 쓰러지고 병원에 실려간다. 다행히 아저씨는 위기를 넘기고 몸이 회복되었다.


두부가게 주인 향숙이는 영주가 돈을 훔쳤다는 사실을 알지만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너는 좋은 애야,
아줌마는 알 수 있어


삼백만 원 돈을 선 듯 내어주면서 네가 돈이 필요해서 그런가 본데 아줌마가 줄 테니깐 가게에서 일하면서 천천히 갚으라고 말한다.


이런 좋은 분이 있다니. 부모님을 죽인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따뜻한 선의를 베푸신다. 그 돈으로 남동생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두부가게에서 계속 일을 하게 되고 가게 주인 부부와 정이 쌓이게 된다. 특히 향숙이는 영주가 일을 묵묵히 잘하고 손끝도 야무지다면서 항상 옆에서 챙겨준다.


향숙이는 영주에게 옷도 선물로 주고, 같이 빚은 만두도 먹고, 길거리 떡볶이도 먹고, 향숙이 집에서 같이 고기도 구워 먹으며 행복한 일상을 보낸다.


마치 둘 사이는 엄마와 딸처럼 보인다. 가게 손님들도 엄마와 딸 같다고 오해를 종종 한다.


어느 날 남동생은 가게 아저씨 얼굴을 우연히 보게 되고, 어디선가 봤던 사람이라는 걸 눈치챈다. 바로 부모님 사고 가해자인 것이다.


남동생은 누나에게 그 사람들은 부모님을 죽인 사람이라고 당장 그 가게 일을 관두라고 한다. 하지만 영주는 이미 자기는 알고 있다고 말한다.


남동생은 그러면 그 가게 주인들도 누나가 피해자 자식이라는 거 알아? 알고도 지금처럼 잘해줄 수 있을까? 따져 묻는다. 영주는 말이 없다.


불안한 영주는 한밤중에 가게 주인집에 찾아간다. 그리고 고백할게 있다고 말한다. 자신은 아저씨가 교통사고로 죽인 부부에 딸이라고 말이다.


충격과 슬픔에 빠진 향숙은 식물인간인 아들 침대에서 새벽 기도를 하고 있다. 영주 마음에 상처를 자기에게 달라며, 그 짐을 내가 십자가로 지고 가겠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미안해서 다시 어떻게 영주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 말을 엿들은 영주는 막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리고 강이 보이는 다리를 걸어간다. 잠시 후 다리 난간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영주는 차마 뛰어내리지 못하고 내려와서 다리 난간을 붙잡고 한참 동안 오열한다. 그렇게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영화는 사람에 모습을 양면적으로 보여준다.


영주네 고모와 고모부는 겉으로는 영주와 남동생을 도와주면서 알고 보면 언어폭력을 행사하고 자신들 잇속을 챙기기에 급하다. 겉모습과 달리 실제로는 영주에게는 나쁜 사람일 수 있다.


교통사고 가해자인 향숙이네 부부도 마찬가지이다. 영주 부모님을 죽인 나쁜 사람이지만 정작 영주에게는 엄마처럼 이것저것 챙겨주고 잘못한 그녀에게 선뜻 큰돈을 빌려준다.


영주가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녀는 부모님 복수를 꿈꾸고 가게에서 돈을 훔쳤다. 동생을 끔찍이 챙기지만 동시에 사고뭉치 동생에게 짜증을 낸다.


영주가 과연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감독은 이런 경계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내가 내 모습을 바라볼 때 그러하다. 대체로는 좋은 사람으로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종종 있다. 그게 바로 사람에 모습이 아닌가 싶다.


향숙이가 내민 따뜻한 손길은 사람 안에 잠재된 선한 모습을 이끌어낸다. 만약 돈을 훔친 영주에게 죄를 물었더라면 영주에 좋은 마음을 이끌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좋은 사람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선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냐 어떤 인연이냐에 따라서 그것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 선한 마음을 이끌어 주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속 향숙이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톨릭 신자이다. 그녀에 선한 영향력은 믿음에서 기인했을 수도 있다.




사주팔자를 공부하기 전에는 내가 베풀었는데 왜 욕을 먹는지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서 객관적인 관점을 조금 갖게 되니, 내가 베풀었다고 생각한 것은 내 생각이었고 받는 상대방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나 스스로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타인이 바라보는 내 모습은 나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니 그나마 내 억울함이 풀리기 시작했다. 억울함에 시작은 내게서 출발한 것이었다.


내가 씨앗을 뿌렸고 내가 거둔 것인데, 내가 뿌린 씨앗은 까먹고 내가 예상한 열매가 아니니 화를 낸 꼴이었다.


양자물리학에 이중 슬릿 실험에 의하면 고정적인 것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쳐다보는 순간에는 입자이고 쳐다보지 않으면 파동으로 존재한다.


특히 인간관계라는 것은 더욱더 상대적이다. 내가 쳐다보지 않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내가 주시하는 순간에 바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분류가 되어버린다.


감독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평소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혼합되어 있고 내가 좋은 사람으로 손을 내밀 때, 상대방이 선한 사람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아닐까?


감독은 김향기 배우에게 “20년 동안 가지고 있었던 나의 모습을 본 것 같다"라고 한다. 가슴이 아리고 먹먹한 이야기이지만 생각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영화이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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