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웃으며 졸업한 엄마의 항암

동생을 보내고

by 실버라이닝

올해 2월,

엄마의 생신 날 우리 다섯 식구는 다 같이 동네 대게집에 갔습니다.

비싼 대게를 세트로 시켜먹고 기분 좋게 웃으며 엄마에게 인사했습니다.


"엄마, 올해는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기!"


그리고 딱 한 달 후

엄마가 자꾸만 겨드랑이에 덩어리가 잡히면서 통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유방암 2.5기였습니다.


유방에서 임파선까지 종양이 보인다는 진단을 듣고

수술 날짜를 잡기로 했습니다.

수술을 해봐야 암의 진행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엄마는 만성신부전증 환자로 20년이 넘게 신장 투석을 해오고 계셨습니다.

수술도 수술이지만 항암이 문제였습니다.


신부전증 환자는 신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약을 사용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건강한 사람의 경우 항암제를 투여하면서 수분을 충분히 흡수하여 독한 성분을 최대한 배출하는 데 비해

신부전증 환자는 소변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수분을 투여하기 어려워 항암 성분을 그대로 온몸으로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수술 후 항암 시작 날짜를 잡고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희망과 염려 사이에서 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일상을 보냈습니다.


억지웃음이라도 지어 보이며 웃어야 할지

아니면 무거운 분위기 그대로 조용히 지내야 할지


이제 막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저는 차마 갈 수가 없었습니다.

힘없이 누워 계신 엄마를 두고 제 건강을 챙기러 운동을 하기가 미안했습니다.

당분간 쉬기로 하고 마지막 운동을 하고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누워 계신 엄마를 끌어안고 아이처럼 엉엉 울었습니다.


"엄마, 죽지 마. 엄마 없으면 난 어떡해. 엄마 여기 맨날 누워있어도 좋으니까 제발 조금만 더 같이 살자..."


엄마는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저를 토닥였습니다.


"내가 널 두고 어떻게 가니. 너 혼잔데... 엄마 괜찮을 거야. 안 죽을 거야..."




엄마의 항암은 4차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약도 신부전증을 고려해 상대적으로 약하게 투여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건강한 분들의 경우 보통 33시간 동안 항암제를 맞고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으면 다음날 퇴원을 하시지만

엄마의 경우 부작용이 걱정되어 일주일 정도 입원을 하기로 했습니다.


첫 항암치료를 위해 입원 준비를 마치고 문을 나서는 엄마와 저에게

남편과 아이들이 외쳤습니다.


"장모님! 쫄지 마세요!"

"할머니! 파이팅! 잘하고 오세요!"


마치 전장에 나가는 장수에게 건네듯 투지를 불태우게 하는 응원이라니.

과연 우리 식구들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엄마도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응~ 살아 돌아올게."


입원 준비를 마치고 누운 엄마에게 옆 침대 환자분이 인사를 건넸습니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

"유방암 수술하고 이제 항암 시작하러 왔어요."

"응~ 난 항암 끝나고 이제 복원 수술했어요. 항암보다 이게 더 아파요."

"아이고 그러셨구나. 항암은 안 힘드셨어요?"

"여기 선생님이 잘하셔요. 걱정 마세요. 별거 아니에요. 그리고 항암 1차 하면 머리가 금방 다 빠져요. 여기 유명한 가발 파는 곳이야. 여기서 미리 사놔요."


바짝 얼어있던 엄마의 표정이 한결 나아지는 게 보였습니다.

암 앞에서는 사랑하는 딸과 사위와 손주들의 응원보다도 방금 그 과정을 마친 선배의 한 마디가 최고의 예방주사였습니다. 엄마는 제게 이제 가보라고. 내일 항암주사 맞고 전화한다고 씩씩한 목소리로 저를 보냈습니다.


항암 주사를 맞을 때마다 매번 부작용이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처음엔 온몸에서 열이 나고 몸살이 심했습니다.

두번 째에는 뼈라는 뼈가 다 아파서 잠을 한 숨도 못 주무셨고요.

세번 째에는 배가, 네번 째에는 머리의 통증이 사람의 진을 다 빼놓았습니다.


동생이 있었으면 엄마를 챙기는 일도 반으로 줄었을 텐데

엄마는 마음 한편에 저 혼자 간병을 책임지는 상황이 미안했던지

자꾸 집에 얼른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어찌어찌 네 번의 항암치료가 끝났습니다.

항암제 투여를 위해 일주일간 입원 후 2주간 쉬었다가 다시 다음 항암을 위해 입원하는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코로나로 2일에 한 번씩 코로나 검사를 하는 건 이젠 일도 아니었어요.

다행히 회차를 거듭할수록 엄마는 투병에도 요령이 생겨 미리 고통을 대비하고 잘 참아냈습니다.

항암 사이사이 투석도 여전히 일주일에 3번식 하셨고요.


그런 엄마가 너무 고맙고 대견했습니다.



하지만 엄마도 사람이기에 정말 고통이 심했던 날은 말도 안 되는 짜증을 냈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저도 안쓰러운 엄마에게 짜증으로 되받아치기도 했습니다.

그래 놓고 다음 날이면 서로에게 미안하고 안쓰러워 어색한 손을 만지작거리며 쓸데없는 안부를 묻기만 했습니다.


언제나 집보다 공부나 일을 더 좋아했던 저는 사실 엄마와 이렇게 스킨십을 많이 하고 대화를 오래 나눈 적이 없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저보다 엄마와 취향이 잘 맞고 가정적이었던 동생이 늘 엄마 곁에서 소소한 일상을 나눠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동생은 없고 무뚝뚝하고 겉돌기 좋아하는 저 하나밖에 안 남았으니 엄마도 이 상황에 적응해 가는 중이었겠지요.


일 욕심이 많았던 제가 엄마가 항암을 시작하고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매정하게도

아픈 엄마 앞에서

막상 하던 일을 멈추는 결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문득,

집에 와서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내가 만약 아이들이 똑같이 아파도 이렇게 일과 간병 사이에 고민했을까?

아이들 중 누구 하나라도 암에 걸렸다면 일을 멈추는 것을 망설였을까?


답은 '아니오'였습니다.


갑자기 엄마가 더 안쓰러웠습니다.

엄마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오랫동안 중풍으로 방에만 누워계셨던 외할머니를 간병했던 엄마.


그 누구에게도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을 풍족하게 못 받아보신 엄마에게

내가 엄마가 되어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외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불쌍한 내 새끼 아파서 어쩌냐'


하고 끌어안아주셨을 그 마음으로

제가 엄마의 엄마가 되어 주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네 번의 항암을 무사히 견뎌내고

30번의 방사선을 더 하고 나서야

마침내 엄마는 기나긴 항암의 과정을 마쳤습니다.


졸업.


엄마의 항암에 '졸업'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습니다.


우리는 함께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고 추억을 쌓았습니다.

함께 입원한 분들과 우정을 나누었고

의사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잘 따르기도 하고 투정을 부려 다툼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교무실을 드나드는 학부형의 마음으로 병실을 드나들었으니

졸업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립니다.


30번째 마지막 방사선을 마치고

집에서 쉬고 계실 엄마에게 드릴 꽃다발을 샀습니다.

엄마에게 안겨드리며 이렇게 말하려고요.



"엄마! 졸업 축하해요!"



이전 07화#7 형제가 몇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