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야, 우리 이제 그만 헤어져
달리기에게,
너랑 나, 꽤 오래 만났지. 처음엔 몰랐어. 네가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힐 줄은.
코로나 때였던가, 세상은 멈췄는데 나는 멈출 수가 없던 시기에 너를 만났지. 처음엔 솔직히 힘들었어. 숨은 차오르고 다리는 말을 안 듣고, 몇 번이나 중간에 돌아갈까 생각했어. 근데 이상하게 조금만 더 버티면 몸 안에서 안 좋은 기운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어. 발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설명 안 되는 것들이 머리 위로 쉭— 하고 사라지던 그 순간들. 그때 나는 너에게 반했어. 아니, 착각했지. 너랑 있으면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너만 있으면 유산소는 평생 문제없을 거라고.
그 후로 한동안 우리는 자주 만났지. 안양천도 달리고, 낭만러닝클럽에도 들어가서 100일을 채우고, 기어이 10km도 함께 했지. 1시간 13분. 빠르진 않았지만 그날의 나는 너랑 꽤 잘 어울린다고, 우리 제법 괜찮은 커플이라고 믿었어.
문제는 그다음이었어. 나는 너랑 잘 지내고 싶어서 계속 노력했어. 살도 빼고, 근육도 만들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생각했어. 그 정도면 너도 나를 더 좋아해 줄 줄 알았거든. 근데 너, 나를 더 힘들게 하더라. 애정이 식은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애였는지. 왜 하필 1km야? 꼭 거기서 나를 멈춰 세우는 이유가 뭐냐고. 내가 투정을 부릴때마다 넌 말했지. 호흡이 문제리고. 그런데 어떡해. 난 48년을 그렇게 숨 쉬어 왔는데. 결국 늘 1km만 되면 폐가 찢어질 것 같고, 숨이 나보다 먼저 포기해 버리는 걸. 그래, 그때부터 네가 조금씩 싫어졌어.
특히 그날. 안양천에서 달리다가 내 모습을 들킨 날. 남편이 그랬어. “너 지금 러닝머신 뛰는 사람 같아. 계속 뛰는데 제자리야.” 그 말을 듣고 처음엔 웃었지. 근데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까, 진짜 제자리인거야. 그게 나였어. 그 뒤로는 더 심해졌지. 무릎보호대까지 차고, 애플워치로 심박수 체크하면서 너 만나러 갔는데 넌 어땠지? 묵묵부답. 나는 러닝센터 가서 수업도 20시간이나 들었다고. 사람 하나 바뀌는 시간이라던데, 왜 우린 더 어색해진 거지? 폼은 꼬이고, 호흡은 더 꼬이고. 넌 여전히 내게 무심하고, 이게 짝사랑이 아니면 뭐야? 난 정말 지쳤어.
너는 잘 뛰는 사람들이랑 어울려. 공근육이랑, 이영백이랑. 걔네는 너랑 잘 맞더라. 뛰면서 중간에 걷지도 않고 대화도 하던데? 10km를 한 시간에 끊고, 숨도 안 차 보이더라고. 나는 중간에 쉬지 않으면 도저히 그 거리를 채울 수 없는데. 애초에 체질이 다른 건지. 아무튼 걔네들과 함께 할 때 너, 행복해 보이더라.
그래, 솔직히 말할게. 나 요즘 새로 만나는 애 있어. 천계라고. 풀네임은 천국의 계단이야. 처음엔 걔도 나를 힘들게 하는 것 같았는데 만나보니까 꽤 괜찮은 애더라. 무엇보다 공평해. 걔만 만나면 다 힘들다고, 다 죽는다고 난리거든. 나만 유난 떠는 게 아닌 거지. 그래서인지 인기도 많아서 자리 나면 거의 자리 쟁탈전이야. 근데 만나면 만날수록 걔가 좋아져. 비록 제자리 계단이지만, 적어도 내가 올라가고 있다고 계속 말해줘. 애플워치를 깜빡해도, 화면으로 심박수를 보여주며 묵묵히 올라가게 만들어주고 핸드폰으로 힘이 나는 릴스영상도 볼 수 있게 배려해줘.
달리기야. 우리 좋았던 때도 있었지. 안양천에서 숨이 터질 것 같던 날들. 모기랑 날파리를 먹으며 땀을 뻘뻘 흘리던 여름 밤들. 하지만 우린 여기까지인 것 같아. 잘 살아. 러닝화도 다 버렸어. 천계는 나 러닝화 안 신어도,좋대.
잘 지내. 안녕.
2026년 4월의 어느 날
안양천 하니, 정은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