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칠 수 없는 나를 입다

조명 아래 드러난 마음

by 실버라이닝

생애 첫 피트니스 대회를 앞두고

비키니 의상을 맞추러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흰 벽에 둘러싸인 밝은 공간이 나를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정은님?

핏모델 나가신다고요?


대표님과 인사를 하자마자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전면 거울이

나를 압도한다.


좋아하는 색을 확인한 뒤

빠르게 피팅이 이어진다.


“일단, 이거랑 이거 입어볼게요. 여기서 바로 옷 벗고 갈아입으시면 돼요.”


“지금요? “

잠깐 멍해졌다.


아, 맞다.

나 비키니 사러 왔지.

그럼… 다 벗고 입어봐야지… 그치…



망설일 틈도 없이 옷을 벗고

비키니를 입었다.


대표님이 다가와

등 뒤의 끈을 묶어주자


본능적으로

가슴을 모았다.


“키에 비해 흉통이 좀 크시네

가슴 모으지 말고,

조금 벌려볼게요.”


그때부터 전면 거울에

흉통만 보인다.


이걸 어떻게 줄이지.


팬티를 입으니,


엉덩이는

평소의 반도 안되어 보인다.


이걸 어떻게 키우지.


그동안 만들었다고 믿었던 것들이

몽땅

어딘가로 사라진 것 같았다.


아직 괜찮다고 미룬 것들.

아직 이루지 못한 모양들.


앞으로

얼마나 더 해야 할까.


여기서 더 달라질 수 있을까.


갑자기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키니는

거의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가리는 역할이 아니라

되려 몸을 드러내기 위한 라인 정도.


그래서인지

몸을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조명 아래

거울 속

적나라한 몸은


센터에서 운동하다가 마주친

거울 속 모습과

전혀 달랐다.


여기가 대회장이라면.


아무도 없지만

시선이 느껴지는 은색반사면.


심사위원 앞에 선 것처럼

몸이 먼저 반응했다.


수업 시간에 연습했던 포징을 떠올리며


중심을 잡은 다리를 밀고,

오른 다리를 뻗고


어깨를 으쓱

엄지와 검지로 작은 하트.


다시 어깨, 가슴, 허리

그리고 표정.


하나씩 맞춰보려 했다.



그런데


자꾸만 삐그덕 구부정하기만 하다.


어깨를 의식하면 허리가 흐트러지고,

허리를 잡으면 힙이 빠지고,

표정을 신경 쓰면

몸이 어색해진다.


순서를 다시 떠올려보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전부 뒤죽박죽이 될 뿐.


이게 바로 대략 난감.



아,

무대에서도 이러면 안 되는데.


초보 중의 초보

너무 아마추어 티가 팍팍 나잖아.


물론,

나는 아마추어이긴 하지

그래도

대놓고 그렇다고 광고하고 싶지는 않은데


몸도 엉망

포징도 엉망

표정은 제일 엉망.



어떡하지.



그때 마음속에서 무언가 훅 올라온다.


조명 아래 반짝이는 그건

의상도 구두도

귀걸이나 팔찌가 아닌

마음속 무엇.



거울 앞에 서서

다시 한번 나를 본다.


용기가 필요한 순간.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받아들인다.


조명 아래 달라진 건

몸이 아니라

달라진 시선.


숨길 수 없으므로,

핑계도 함께 사라진 화면.


거울 속 나는

비키니가 아닌


도망칠 수 없는 나를 입고 있다.


상상 속의 내가 아닌

부족한 나

미완의 나


시선을 피하지 않기로

용기를 내자


밝은 조명 아래

다시 몸이 드러나고


그보다 더 선명하게

마음이 드러난다.


그래, 부족한 채로

나아가자.

절뚝거리며

완주하자.


잠시,

조금 작아졌지만

동시에,

그만큼 더 커지고 싶어진 마음.


부족한 곳이 보일수록

더 채우고 싶어진 마음.


그렇게

위축과 의지는 같은 자리에서

부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