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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라이닝 Jan 31. 2024

생의 아이러니

호스피스 병동으로


1월 28일 일요일 오후




엄마와 산책을 했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고 한 달 만이다.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눈만 겨우 뜬 엄마가 조용히 말했다.



"나 밖에 나가고 싶어."



한 달 전만 해도 씩씩하게 걸어 다니며 동네 마트에서 장을 봐왔던 엄마가 나에게 온몸을 의지한 채 겨우 휠체어에 몸을 옮겼다. 밖이라고 해봐야 병원 야외 공원이지만 이 마저도 우리에게 너무나 고마운 공간이었다. 







다행히 1월 오후의 볕이 따뜻했다. 휠체어를 밀고 공원으로 들어서자 2년 전부터 엄마가 항암을 할 때마다 함께 앉아 빵을 먹던 벤치가 보였다. 엄마와 나는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앉았다. 



"엄마, 우리 얼마 전만 해도 여기서 웃으면서 빵 먹었는데..."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엄마는 이제 울지 않기로 했는지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게. 왜 이렇게 됐을까..."



그리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고는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그 많던 비둘기들은 다 어디 갔나?"



그 말에 내가 들고 있던 과자를  벤치 앞에 뿌렸더니 온 동네 비둘기들이 소식을 듣고 날아왔다. 우리 주변에 비둘기들과 참새들이 북적이니 부산해져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1월 30일 화요일 오전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 아침을 챙기고 집안일을 서둘러 마쳤다. 엄마가 꼭 챙겨 오라는 짐을 챙기고 문을 나섰다. 오늘은 엄마가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기는 날이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간병사분께 인사를 드리고 이제 가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다. 간병사분은 차 타고 떠나는 것까지 보고 가겠다고 버티셨다. 그 말에 나는 또 고마워서 눈물이 쏟아졌다. 도대체가 내 눈물 타이밍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오는 길에 사 온 롤케이크를 손에 쥐어드리며 내쫓듯이 간병사분을 보내드리고 전원에 필요한 서류를 받으러 오전 내내 뛰어다녔다. 가기로 한 호스피스 병동 신장 내과 선생님이 퇴근시간이 겹쳐서 오후 3시까지는 와야 한다는 말에 마음이 급해졌다. 



 속에 입은 반팔 셔츠가 다 젖도록 원무과와 접수창구, 약국을 뛰어다녀 모든 서류 준비를 마치고 시간에 맞춰 사설 구급차를 불렀다. 



사설 구급차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연결해 준 곳이었다. 출발 당일 오전에 먼저 전화를 걸어 대략적인 시간을 알려드리고 퇴원 수납을 하는 동안 전화를 거니 시간에 맞춰 병실로 와주셨다. 



여자 한 분과 남자 한 분, 구급 대원 두 분이 오셔서 엄마를 최대한 부드럽게 침대로 이동시켜 주셨고 내가 가진 짐도 하나하나 다 챙기며 나는 그냥 걸어오라고 해주셨다. 다정한 말투와 목소리에 전원 준비를 하는 긴장된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누구에게든 친절하라'라는 글귀가 떠올랐다. 당신이 만나는 사람은 오늘 힘든 하루를 보냈을 것이기에 누구를 만나든 친절하라던 말. 



오늘 나에게 그들의 친절한 말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 편지만큼 따뜻했다.



병실을 나서는데 복도에서 티브이를 보시던 옆자리 환자분이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가시는 구나, 아이고 잘 가요. 아이고..."


갑자기 눈물을 보이시는 아주머니께 엄마는 입만 겨우 웃어 보이며 힘없이 오른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1월 30일 화요일 오후




호스피스 병동에 도착했다. 






4인실에는 환자 두 분이 창백한 얼굴로 누워계셨다. 한 분 옆에는 남편으로 보이는 분이 환자의 얼굴을 쓰다듬고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고 계셨고, 또 다른 한 분 옆에는 자매로 보이는 분이 앉아 책을 읽고 계셨다. 



병실 담당 간병사분이 엄마를 환자복으로 갈아입혀주시는 동안 주치의 선생님, 상담실장님과 그간의 엄마 병력과 항암 히스토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최대한 차분히 설명했다.



잠시 후 사회복지사분이 오셔서 엄마의 심리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여태껏 다른 질문엔 눈물을 잘 참으며 대답하다가 한 질문에 그만, 폭발했다.



" 엄마가 아프시기 전에는 어떤 분이셨나요?"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아이처럼 숨이 넘어가게 울고 말았다.  




내 기억 속 젊은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딱 지금의 내 나이였다. 엄마는 웃음소리가 크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살이 많이 쪘다며 에어로빅 교실에 열심히 다녔고 운동회 때 학부모 대표로 달리기도 했다. 동네 엄마들에게 늘 활동적이고 상담을 잘해주는 이웃이었다. 



말수가 적었지만 농담을 잘하고 츤데레 스타일이었던 아빠를 무척 좋아했던 엄마는 아빠 옆에선 늘 천생여자였다. 아빠와의 연애시절 이야기도 자주 들려주었는데 그때마다 아빠가 좋아했던 아빠의 첫사랑 이야기도 빼놓지 않아서 마치 나도 아는 사람 같을 정도였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신장 투석을 시작한 엄마는 많이 힘들었을 텐데 딸 일하라고 손녀를 매일 어린이집에서 하원시켜 저녁까지 돌봐주고 반찬까지 해주셨다. 동생을 먼저 보내고 엄마와 한집에 살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다. 다 큰 성인들이 뒤늦게 같이 살려니 처음엔 꽤 삐걱거렸다. 이제 조금 호흡이 맞으려던 차인데 곧 엄마를 보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는 요즘 그토록 원하던 딸의 사랑과 관심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한 집에 살면서도 하루 중 내가 엄마만 바라보고 엄마와 대화한 시간은 많지 않았다. 엄마가 항암 치료를 시작하고 나서야 둘이 외식을 자주 하고 엄마와 손을 더 많이 잡았다.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고 엄마가 스스로 움직이고 못하게 된 후로는 대부분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예전엔 엄마가 부르고 요청을 해야 겨우 보살폈는데 이제는 내가 먼저 묻고 챙기며 돌본다. 






예전에 낯선 동네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리는데 차가 하도 오지 않아 옆에서 기다리던 아주머니께 버스가 오는 곳이 맞냐고 물은 적이 있다. 아주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아, 기다리면 안 오고 안 기다리면 오는 5번 버스? 여기 정류장 맞아요. 기다리지 말아야 와."


5번 버스처럼


곁에 있을 땐 미워하다가, 비로소 사랑하니 떠날까 봐 두렵다. 






1월 30일 화요일 저녁




남편이 퇴근길에 엄마를 보러 왔다. 장모님 얼굴을 한 달 만에 보는 남편은 엄마를 보자마자 눈가가 빨개졌다. 엄마의 부은 손을 잡고 남편은 눈물을 참고 웃으며 인사했다.



"저 왔어요. 뭐 드시고 싶은 건 없어요? 애들은 주말에 데리고 올게요. 뽀식이는(우리 집 반려견) 못 오니까 핸드폰으로 보셔야겠네."



하루 종일 기운이 없던 엄마가 갑자기 각성이 되어 눈을 맑고 동그랗게 떴다. 아니 사실 크게 뜨려고 애를 쓰는 게 보였다. 사위 앞에선 언제나 단아하고 고운 모습이고 싶은 엄마의 의지가 느껴졌다. 



안간힘. 



사람이 기운이 다했을 때 간 안에 저장되어 있는 힘을 꺼내 쓴다고 했다. 엄마는 마지막 안간힘을 꺼내 사위 앞에서 또렷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는 듯했고 눈치 빠른 남편은 그 마음을 알고 또 눈시울을 붉혔다. 



나 대신 울어주는 남편이 있으니 오늘은 내 눈물이 조금 가벼워졌다. 





1월 31일 수요일




행복은 이토록 잔인하게 상대적이다. 






호스피스 병동 가족실에 앉아 도시락으로 싸간 샐러드를 먹고 있었다. 옆 자리 테이블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과 (대화로 추측해 보건대) 고모로 보이는 분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너무 잘 들렸다. 



대장암 말기인 듯한 아버지와 이혼 준비를 하고 있던 엄마 이야기, 아버지가 벌여 놓은 사업을 정리하러 다니느라 바쁜 이야기를 하는 청년이 너무 씩씩해서 오지랖을 떨며 가서 응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나는 행복한 거구나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너무 이기적이고 잔인하게 느껴졌다. 남의 불행을 보며 나의 행복을 찾다니. 동시에 누군가 나의 불행을 보고 행복을 찾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질투와 엷은 분노가 올라왔다. 샐러드를 먹는 짧은 5분 동안 많은 감정이 오고 갔다. 




신은 없다. 



만약 신이 있다면 일을 정말 거지같이 하고 있다. 이렇게 수많은 인생들을 뒤죽박죽으로 엉켜놓다니 말이다. 서로가 서로의 행불행을 보며 자신의 행불행을 가늠하게 만들다니 일을 이따위로 하냐며 욕을 한 바가지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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