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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 콜을 닮은 대마법사는 ‘노래 한 곡을 부르는 사이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 지은은 머릿속 주크박스에서 나탈리 콜의 <Winter Wonderland>를 플레이했다.
Sleigh bells ring, are you listening?
징글벨, 듣고 있나요?
In the lane, snow is glistening
길 위에 쌓인 눈이 반짝이네요
A beautiful sight
참 아름다운 풍경이죠
We're happy tonight
오늘 밤 우리는 행복해요
Walking in a winter wonderland
환상적인 하얀 세상을 걷고 있으니까요
나탈리 콜의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자 어미 파랑새와 아기 파랑새가 플루트와 피콜로 소리로 지저귀며 지은 앞으로 다가왔다. 순식간에 눈앞에 디즈니의 <환타지아>에 나왔을 법한 마법의 숲이 생겼다. <환타지아>에서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숲이 춤을 췄었는데, 지금 지은 앞에 펼쳐진 숲은 그 자체가 오케스트라다!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몸을 비비면서 바이올린 선율을 만들어 낸다. 땅 밑에서는 서로 엮인 뿌리들이 가지들에게 질 세라 흙 속을 파고들며 콘트라베이스를 맡는다. 지은은 파랑새 모녀를 따라 오케스트라 숲 속으로 들어갔다. 마치 숲 오케스트라가 나를 위해 반주를 해 주는 것처럼 나탈리 콜의 목소리에 맞춰 립싱크를 하면서 춤추듯 걸었다.
반딧불이 이슬방울을 풀잎에 떨어뜨리면서 실로폰 연주를 시작하자, 거미가 얼른 거미줄 하프를 연주한다. 반짝이는 금빛 뱀이 풀잎 사이에서 머리와 꼬리를 흔들면서 헤엄치듯 미끄러지며 오보에 소리를 낸다. 어느새 크고 작은 나무 둥치마다 너구리들이 자리를 잡고 퍼커션을 맡는다. 은은하게 스며드는 첼로 음색은 나무를 휘감으며 쭉쭉 뻗어 오르는 아이비 줄기들이다.
나뭇가지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아이비 첼리스트들에게 잡힐까 봐 더 높이 활을 치켜든다. 흥분한 나뭇가지의 보잉(bowing)에 버티지 못한 수리부엉이가 클라리넷 울음을 터뜨리며 날아오르자 붉은 머리 버섯 군단이 브라스를 들고 나와서 나탈리 콜의 노래, 지은의 립싱크, 오케스트라 숲의 연주를 화려하게 마무리한다. 나뭇잎들이 보내는 박수갈채에 지은은 눈을 감고 고개를 깊게 숙여 인사한다.
고개를 들고 눈을 뜨자 오케스트라 숲도 파랑새 모녀도 사라졌다. 숲이 있던 자리에 갈림길이 나타났다. 왼쪽으로 향하는 파란 이정표에는 ‘My Way’, 오른쪽으로 향하는 빨간 이정표에는 ‘Lonely Street’이라고 쓰여 있다. 지은 오른편에서 반짝이는 핑크빛 네온은 이제 글자가 보일락 말락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대마법사가 알려 준 핑크빛 네온이 묶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은은 ‘My Way’를 선택할 생각이 없었다. 벌써 끝이 다가오는 것은 아쉽기 때문이다. 이 여행의 마지막 장을 벌써 시작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대마법사와 레그바에게 호기롭게 선언한 것처럼, 무언가 잃어버린 것을 스스로 찾기 위해서라면 지금 프랭크 시나트라를 만나면 안 된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가 이렇게 시작하기 때문이다: And now the end is near (이제 곧 마지막입니다) / And so I face that final curtain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있답니다)
‘그나저나 ‘Lonely Street’라…… 오늘 밤 묶을 곳은 하트 브레이크 호텔이구나.’
It’s down at the end of Lonely Street
저 아래 외로움의 거리 끝에 있어요
At Heartbreak Hotel
하트브레이크 호텔 말이에요
지은은 머릿속에서 들리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목소리를 따라 론리 스트리트로 들어갔다. 이제 핑크빛 네온사인은 지은의 예상대로 ‘Heartbreak Hotel’이라는 글자의 형태를 선명하게 띠고 있다. 밤이 깊어서인지 호텔 입구에 가사에 나오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벨보이'는 없었다. 지은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는 어두웠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검은 옷을 입은 컨시어지가 나와 주리라 기대하며 데스크로 다가가 벨을 눌렀다. 하트브레이크 호텔은 언제나 만원이지만 언제나 방이 남아 있을 테니까. 지은은 머릿속에서 <Heartbreak Hotel>의 가사를 복기했다.
Well, though it’s always crowded
호텔은 항상 붐비지만
You still can find some room
방은 항상 남아 있어요
데스크 뒤편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은은 컨시어지가 아니라 단잠을 자던 대형견을 깨운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다행히 그르렁 소리는 멈추었고 데스크 조명이 켜졌다. 지은이 막 안심하려던 순간 거대한 블러드하운드가 나타났다. 지은이 깨운 것은 정말로 대형견이었다!
다만 무척 고급스러운 검은 정장을 입고 직립 보행을 하고 있을 뿐이다. 가슴 주머니에 꽂은 손수건은 넥타이와 같은 색깔이었다. 축 처진 눈만 아니면 방금 잠에서 깬 모습이라고 볼 수 없는 완벽한 차림이었다. 블러드하운드 컨시어지의 얼굴은 완벽한 옷매무세에 걸맞지 않게 축 늘어져 있었다. 두 눈 다 뜨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이 한쪽 눈꺼풀만 살짝 들어 지은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는 놀라서 얼어붙어 있는 지은을 앞에 세워두고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느릿느릿 서랍을 열고 열쇠를 꺼냈다.
“201호. 계단으로 한 층 올라가서 복도 끝 방. 아침식사는 6시부터 11시까지, 1층 카페테리아에서.”
여전히 아무 반응을 못하는 지은에게 컨시어지는 제 할 말만 툭 던진 뒤 등을 돌렸다. 느릿느릿 데스크 뒤편으로 가다가 고개를 휙 돌려 한 마디를 더 던졌다.
“계단서가의 책은 마음대로 이용 가능”
블러드하운드 컨시어지는 데스크 뒤편으로 사라졌다. 데스크 조명이 꺼지고, 왼편에 은은한 조명이 켜졌다. 계단을 따라 서가로 만들어진 벽이 보였다. 지은은 한동안 어두운 데스크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Hound Dog>의 가사를 떠올린 것이다.
You ain't nothin' but a hound dog
넌 그냥 아무것도 아이야, 한낱 개라고
‘그렇구나. 별일 아니구나. 그냥 하운드독일뿐이구나.’
안심한 지은은 데스크 위에 놓인 열쇠를 집었다. 명색이 서비스업이면서 경어를 한 마디도 쓰지 않았지만 제 할 일은 제대로 하는 컨시어지 덕분에 계단은 안전하게 올라갈 수 있겠다. 지은은 천천히 계단을 오르면서 서가를 대충 훑어보았다. 조명이 은은해서 책 제목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민지라면 아마 계단 한 칸 한 칸 멈춰 서서 서가를 샅샅이 살펴봤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밤새 읽을 책을 고를 생각은 추호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 겪은 일을 소화하기에도 벅찬데 머릿속에 책까지 들어갈 틈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계단 서가 끝에 작은 사각 탁자에 놓인 책이 지은의 눈을 확 잡아끌었다.
SWEET DREAMS · are made of this ·
익숙한 제목 밑에 강렬한 오렌지색으로 염색한 바싹 깎은 머리에 검은 정장을 입고 정면을 바라보는 애니 레녹스와 카메라를 등진 데이비드 스튜어트의 사진이 있다. 유리드믹스의 앨범 《SWEET DREAMS (are made of this)》 재킷과 같은 디자인이다.
‘아!’
앨범 타이틀곡 <SWEET DREAMS (are made of this)>의 뮤직 비디오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엎드린 자세로 누워 있던 애니가 침대 옆 탁자의 스탠드를 끄려고 손을 뻗자 카메라는 스탠드 밑에 있는 책을 줌 인 한다. 앨범 아트워크와 같은 표지의 바로 그 책이 지은의 눈앞에 등장한 것이다! 지은은 하트브레이크 호텔의 조식 시간이 길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집어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초현실적인 컨시어지에 비해 방 안은 평범했다. 부산 출장을 갈 때마다 이용했던 가성비 좋은 비즈니스호텔 객실과 비슷한 느낌이라 마음이 편했다. 더 이상 놀라거나 생각을 해야 할 요소가 전혀 없어서 그냥 쉬기만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커튼과 창문을 열자 새카만 어둠이 방 안으로 훅 들어왔다. 레이디버그가 배 위에서 봤던 어둠처럼 어디서부터가 땅이고 어디서부터가 하늘인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어둠이 휘감아 버려 땅과 하늘의 구분이 없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문득 지은은 시간이 확인하고 싶어졌다. 방 안 어디에도 시계는 없었다. 그제야 핸드폰을 웨스트마운틴 카페 탁자 위에 놓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지은은 프런트에 전화를 하여 시간을 물어볼까 생각을 했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막 다시 잠들었을 것 같은 그레이하운드 컨시어지의 짜증 섞인 그르렁 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윈터 원더랜드에 들어온 이후 시간 감각이 없어졌다. 웨스트마운틴 카페에 4시 반 정도에 들어갔고, 66번 국도에서 해가 지는 것을 봤으니까, 7월 중순 서울의 일몰시간이 8시 정도라면…. 혼스데일 파크에서 이발사 로이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강둑을 따라 걷다가 바다에 도착에서 만난 레이디 버그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 데 고작 3시간 반 밖에 안 걸렸다고?
지은은 이쯤에서 시간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일단 윈터 원더랜드의 일몰 시간이 서울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입구였던 웨스트마운틴 카페는 을지로에 있었지만, 문을 열면 전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지 않은가. 일단 이곳은 서울과 완전히 다른 계절이다. 지구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르고, 지구에 있기나 한 건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곳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지은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자신의 체감을 믿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갑자기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 온종일 여행을 한 것 같은 노곤함이 몰려왔다.
따끈한 욕조에서 피로를 풀고 나온 지은은 책을 들고 침대로 들어가 벽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앉았다. 침대 옆 스탠드만 남겨두고 조명을 껐다. 지은은 책 표지에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애니 레녹스와 잠시 눈을 맞추다가 책을 펼쳤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가수이자 사회운동가인 애니 레녹스의 이야기가 아니라 윈터 원터랜드에서 태어나 세계적인(이 세계 역시 지은이 알고 있는 윈터 원더랜드 밖 세상과는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안무가가 된 다른 애니 레녹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