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이야기 첫 번째
애니 레녹스의 본명은 제니아 레논(Xenia Lennon)이다. 제니아는 본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아이들은 제니아의 이름 철자가 X로 시작한다는 이유로 엑스맨(X-men)을 떠올렸는데, 제니아에게는 당연히 별명 값을 할 만한 초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는 엑스맨’이 되어버렸다. 일반적인 능력이라면 또래 아이들에 비해 뒤처지지 않았다. 공부도 그럭저럭, 운동도 그럭저럭, 춤과 노래도 그럭저럭 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름이 마블 코믹스의 돌연변이 슈퍼히어로 집단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능력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제니아를 놀리는 아이들 모두 초능력이 없었지만 ‘아무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놀림받는 건 제니아뿐이라는 불합리함에 대해서는 아무도―제니아 자신조차도―인식하지 못했다. 만일 다른 아이들이 뭐라고 하던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주는 어른이 단 한 명이라고 있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제니아의 주변에는 ‘딱히 눈에 띄게 잘하는 것은 없는 아이’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어른들 뿐이었다. 제니아는 자신에게 초능력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탁월한 재능이 단 하나라도 있었다면 냉혹한 아이들의 세계에서 능력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고 스스로를 탓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제니아는 10대 후반부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애니 레녹스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본명의 철자를 그대로 사용하되 자신을 괴롭히던 철자 X를 맨 뒤로 보내버리고, 놀림감이 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사용해 온 ‘애니’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애니는 춤의 매력에 빠져들었지만, 늘 그럭저럭 추는 편이지만 리듬 감각이 어중간하고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평을 늘 받았다. 무용수가 되기에는 치명적인 평가였지만 어차피 애니의 꿈은 무대에서 조명을 받는 무용수가 아니었다. 애니는 탁월한 안무가가 되고 싶었다. 몸과 음악이 하나가 되는 시공간을 창조하는 것이 애니의 꿈이었다. 문제는 안무 실력으로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애니의 안무는 늘 ‘어딘가 어중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윈터 원더랜드에서 열리는 모든 안무 경연 대회에서 계속 탈락했고, 모든 기획사에 꾸준히 안무 시안을 보냈지만 단 한 번도 채택되지 못했다.
애니는 프리랜서 율동 강사로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나갔다. 어린이집부터 노인복지관까지, 상인연합회 신년회부터 대형마트 비정규직 노동조합 송년회까지, 교회 수련회부터 무속인 협회 포럼까지, 밀리터리 동호회 MT부터 반전(反戰) 예술가 피정 프로그램까지, 각 집단에 어울리는 동작을 만들기 위해 애썼지만 아무도 다음 날이 되면 애니를 기억하지 못했다. 모두의 취향에 어느 정도는 맞았지만 누구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유튜브에도 꾸준히 안무 영상을 올렸지만, 조회수는 두 자릿수를 넘기지 못했다. 어쩌다 달리는 댓글도 애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움직임이 미묘하게 리듬과 어긋난다는 댓글이 가끔 달렸고, 춤선이 어색하다는 댓글도 가끔 달렸다. 심지어 예쁘장한 좀비 같다는 댓글도 있었다.
사실 애니는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춘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자세히 보면 미인으로 분류될 수 있는 축에 속하는데 놀랍게도 아무도 애니를 예쁘다고 인식하지 못했다. 애니는 멋진 몸을 유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했고, 화장도 옷도 헤어스타일도 늘 화려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리 애니가 화려하게 꾸미고 있어도 애니를 “아,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 같아” 정도로 밖에 기억하지 못했고 “근데 걔가 누구더라?”가 반드시 따라붙었다.
서른 즈음이 되자 애니는 어중간한 인생에 지쳐갔다. 늘 결과가 어중간할 바에는 치열하게 살지나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모든 일에 힘을 빼보려고도 해 보았지만, 평생 특별해지기 위해 치열했던 애니는 힘을 빼는 방법을 몰랐다. 마침 애니는 딱히 헤어질 이유가 없어 사귀고 있던 오래된 연인 에드워드에게 미지근한 청혼을 받았고, 특별히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해 결혼을 하기로 했다(책 표지에 등을 보이고 있던 남자는 유리드믹스의 데이브 스튜어트가 아니라 애니의 남편 에드워드라고 한다). 결혼 준비는 딱히 문제없이 진행되었지만 애니는 하루하루 가슴이 답답해져 갔다. 답답함은 평생 느껴왔지만 지금까지 느꼈던 답답함과는 달랐다. 가슴이 실제로 짓눌리는 듯한 묵직한 답답함이었다. 매일 아침 답답함에 눌려 잠을 깨는 날이 계속됐다.
결혼식 전날 아침이었다. 그날도 숨이 턱 막히는 느낌과 함께 눈을 떴다. 부엌에서 에드워드가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요? 아침 먹으러 나와요.”
에드워드의 목소리는 여느 아침과 같았다. 애니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침대 맞은편 화장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정말 예쁘장한 좀비 같잖아.’
애니는 한참 동안 멍하니 거울을 보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화장대 의자에 걸려 있던 카디건을 잠옷 위에 대충 걸치고 방 밖으로 뛰어나왔다.
“에드워드, 이대로는 안 되겠어.”
애니는 놀란 에드워드를 뒤로 하고 집을 나와서 방향도 모르는 채로 뛰었다. 이상하게도 숨이 차오르자 가슴을 압박하던 무게추가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가슴이 뻥 뚫린 듯한 느낌이 들면서 멈춰 선 곳은 비비디바비디부 이발소 앞이었다. 애니는 가슴 깊이 숨을 들이켜고 이발소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비비디바비디부 이발소에 오신 것을…”
이발사 로이스는 문이 열리자마자 언제나처럼 경쾌하게 인사를 하다가 멈칫했다. 굵은 웨이브가 넘실대는 금발 미녀가 잠옷 차림으로 이발소에 들어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라푼젤 역 오디션에 참여한다면 딱 저 머리칼 때문에 붙을 것 같은 여자는 로이스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바짝 깎아 주세요.”
로이스는 애니의 말이 ‘이 문장에서 생략된 목적어는 무엇입니까?’라는 문법 시험 문항이라면 정답을 맞힐 수 없다고 생각했다. 로이스가 혼란스럽거나 말거나 애니는 뚜벅뚜벅 안쪽으로 들어와 이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로이스는 조심조심 애니에게 다가갔다.
“아… 음… 저… 제가 여성 손님을 모셔본 적이 없어서요.”
“상관없지 않나요? 깎을 거니까요. 바짝.”
“바짝… 이요?”
“네. 바짝.”
“그러니까 머리카락을… 말인가요?”
“네. 바짝. 많이 해보셨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그런 ‘바짝’ 말씀이신가요?”
“네. 그런 ‘바짝’이요. 늘 하시던 대로 하면 될 것 같은데요.”
“아, 네, 음, 그러면 말이죠… 잠시만요.”
로이스는 샴푸실 옆 간이 부엌으로 들어갔다. 잠시 부스럭거리던 그는 초콜릿 무스 케이크 한 조각을 가지고 나왔다.
“깎기 전에 이거 먼저 드셔 보시겠어요? 제가 직접 만들었답니다.”
로이스는 오렌지 조각을 올린 초콜릿 무스 케이크를 애니에게 건넸다. 혹시라도 순간적인 충동으로 머리를 밀어버리고 후회할 수도 있으니 본격적인 이발 전에 마음을 바꿀 시간을 주고 싶었다.
“오늘 첫 손님께 드리려고 새벽에 만들었어요. 비비디바비디부 이발소의 첫 여성 손님께 드리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자 오렌지 향이 밴 진한 달콤함이 순식간에 입과 목, 가슴까지 가득 채웠다. 애니는 달콤함을 최대한 오래 느끼고 싶어서 케이크를 아주 아주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먹었다. 오렌지 조각만 남겨두고 케이크를 다 먹은 애니는 한참 동안 접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이스는 애니를 보면서 안절부절못했다.
“아… 오렌지를 안 좋아하시는군요, 남기셔도 됩니다.”
“아, 아니요. 그게 아니고요… 이 색으로 할래요.”
“네?”
“염색이요. 오렌지색으로 해주세요.”
마침내 애니는 오렌지 조각을 입에 넣었다. 머리를 바짝 깎겠다는 애니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로이스는 놀라서 이발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마지막 손질을 하던 중 애니가 내일이 결혼식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냥 풀어헤치고만 있어도 웨딩드레스와 잘 어울릴 것 같이 탐스럽게 물결치던 금발은 이미 오렌지색 스포츠머리로 변해 있었다.
“이런 스타일로 내일 괜찮으시겠어요?”
“어차피 드레스에 가장 잘 어울리는 머리를 해도 어중간한 신부일 테니까요.”
“네?”
“아무리 완벽하게 맞추려고 애써도 어중간할 바에야 전혀 안 어울리는 머리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로이스는 애니의 심경을 짐작할 수 없었지만 거울에 비친 애니의 얼굴은 태양을 머금은 오렌지처럼 빛났다. 그동안 수많은 남자들의 머리를 깎았지만, 애니처럼 멋진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이발소를 물려준 아버지도 생전에 이처럼 멋진 손님을 맞았던 적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까지 들었다.
“저…… 죄송하지만 손님.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요.”
“저희 가게 입구에 손님 사진을 걸어도 될까요?”
“제 사진을요?”
“제 이발사 인생에서 최고로 특별한 손님이셔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기가 사진관은 아니지만, 손님 사진을 입구에 걸고 싶어요.”
애니는 그 날을 처음으로 ‘특별한’이라는 수식어가 자신에게 붙은 순간으로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