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브레이크 호텔에서 하룻밤 (4)

by Angela G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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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열어 둔 창문을 통해 들어온 아침 바람이 지은의 얼굴을 간질였다. 지은은 눈을 떴다. 햇살을 머금은 공기가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숨을 한번 들이쉬었더니 기지개를 켠 것처럼 개운함이 몸속에 펴졌다. 지은은 언제 마지막으로 느껴보았는지 기억할 수도 없는 상쾌한 기분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평소의 지은이라면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 불안해하면서 허겁지겁 1층으로 내려갈 준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윈터 원더랜드에서 하루를 보내고 난 오늘의 지은은 서두르지 않았다. 평소 지은이 할 법한 ‘지금이 벌써 10시 40분이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은 ‘11시가 넘은들 어때, 고작 아침 한 끼 못 먹는 건데’라는 마음에 완전히 덮였다. 지은은 언제 마지막으로 느껴보았는지 기억할 수도 없는 느긋한 기분으로 창가에 서서 한참 동안 시원하고 따뜻한 공기를 들이켜고 산뜻한 기분으로 1층으로 내려갔다.


컨시어지 데스크는 어젯밤처럼 비어 있었다. 지은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여전히 하운드 독 컨시어지에게 자연스럽게 인사를 할 자신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은의 안도감은 채 30초를 넘기지 못했다. 카페테리아 입구에는 하운드 독 컨시어지가 어젯밤과 다를 바 없는 축 쳐진 표정으로 투숙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호텔에서 접객을 담당하는 건 하운드 독 컨시어지뿐인 것 같았다.


“아,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네요.”


어색한 인사를 건네는 지은에게 하운드 독 컨시어지는 대꾸 대신 턱으로 발코니 쪽 테이블을 가리켰다. 테이블 위에는 ‘201’이라고 적힌 카드가 꽂혀 있었다. 예쁜 정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였다.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하운드 독 컨시어지는 서비스업에 적합하지 않은 태도로 좋은 자리를 맡아주는 섬세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정원에서는 하얀 토끼 몇 마리가 입을 오물거리며 풀을 뜯어먹고 있다. 토끼들은 컨시어지에게 잡힐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아는 모양인지 여유 가득한 모습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Hound Dog> 가사 중에 하운드 독은 토끼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는 구절이 있다(“Well you ain’t never caught a rabbit.”)


지은은 앞에 놓인 식기와 냅킨을 보고 깜짝 놀랐다. 카페테리아가 유난히 조용하지만 않았어도 크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얀 접시와 커피잔, 냅킨에는 코발트블루색 굵은 폰트로 슬로건이 쓰여 있었다.


A Little Less Conversation
대화는 조금 줄이고

A Little More Bite

조금 더 먹어요


엘비스 프레슬리의 <A Little Less Conversation>에서 가져온 슬로건 때문에 식사 중인 사람이 적지 않은데도 적막할 정도로 조용한 모양이다. 지은이 피식피식 웃으면서 슬로건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하운드 독 컨시어지가 기내식을 배식하는 승무원처럼 카트를 끌고 다가왔다.


“도넛 오어 샌드위치?”


하운드 독 컨시어지가 갑자기 짧은 영어를 툭 던지는 것이 이상했지만, 하운드 독 컨시어지의 존재 자체에 비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잠시 아침 메뉴를 고민했다.


“샌드위치.”


하운드 독 컨시어지는 접시 위에 샌드위치를 툭 얹고, 컵에 콜라를 휙 붓고는(음료는 선택할 수 없는 모양이다) 느릿느릿 다른 테이블로 이동했다. 지은은 토스트 같이 생긴 샌드위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바싹 구워진 식빵 사이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지은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엄마, 땅콩버터를 두 장에 다 바르는 건 너무하지 않아?”


바나나를 썰고 있는 지은 옆에서 혜원은 식빵에 땅콩버터를 잔뜩 바르고 있었다. 프라이팬 위에서는 베이컨이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었다.


“오늘 이걸 먹겠다는 사람들이 바라는 게 조금이라도 칼로리가 적은 거겠어?”


혜원의 음악다방 ‘페이퍼 문’은 광복절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지나가지만 그다음 날인 엘비스 프레슬리의 기일에는 특별 메뉴를 준비했다. 땅콩버터와 딸기잼은 식빵 두 장에 각각 듬뿍, 세로로 반을 가른 바나나와 최대한 바싹 구운 베이컨을 빵 사이에 잔뜩 넣고, 흥건한 버터에 튀기듯 구운 ‘엘비스 샌드위치’를 준비한다.


“진짜 이상해. 이렇게 먹어서 빨리 죽었을 수도 있는 사람 기일에 이런 걸 먹으면서 기념하는 거.”


툴툴거리는 지은에게 혜원은 무심하게 말했다.


“사람들이 기념일에 하는 행동 중에 합리적인 게 있어? 모든 기념일은 멀쩡하지 않은 일을 하려고 존재하는 거야.”


혜원은 매년 8월 16일에는 엘비스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기일을 기념하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있다면서, 우리 주변에도 기념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페이퍼 문도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엘비스 샌드위치가 매출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혜원의 엘비스 데이 이벤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꾸준히 페이퍼 문에 찾아와서 엘비스 샌드위치를 먹었고, 엘비스 데이인 줄 모르고 들어온 사람들도 재미로 주문을 해서 “아이고야, 며칠 굶어야겠네.” 라면서도 즐거워했었다.


어디에도 엘비스 데이에 대해서 써 붙여 놓거나 미리 알리지 않았지만 어떻게 알고 <Blue Suede Shoes> 제목과 같은 파란색 세무 구두를 신고 오는 손님들이 매년 몇 명 있었다. 그런 손님들과 혜원은 마치 암구호를 주고받는 스파이 같은 모습이었는데, 손님이 아무 말 없이 파란 세무 구두를 신은 발을 쓱 혜원에게 보여주면 혜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절대 밟지 않을게요.”라고 대답하고 엘비스 샌드위치 세트를 무료로 제공했다.

엘비스가 <Blue Suede Shoes>에서 “내 파란 신발 절대 밟지 마(Don’t you step on my blue suede shoes)”라고 했기 때문이다.


가끔 엘비스의 또 다른 최애 음식이었다는 도넛을 사 오는 손님도 있었다. 지은은 혜원과 손님이 서로 비장하게 칼로리 폭탄을 주고받는 모습을 좋아했었다. 엘비스 데이를 즐기러 오는 손님들은 혜원보다도 한 세대 정도 윗분들이었는데, 청소년이 흔히 떠올리는 중년과 초로의 어른들의 모습과는 달랐다. 오히려 꽉꽉 짜인 학원 스케줄에 찌든 또래들보다도 생기가 넘쳐 보였다.


그렇다고 혜원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엄청난 팬인 것은 아니었다. 엘비스 데이에 페이퍼 문을 찾는 손님들은 확실히 엘비스 프레슬리의 엄청난 팬이지만 혜원은 지은이 보기엔 꽤나 즉흥적으로 엘비스 데이 이벤트를 시작했다.


“마흔두 살이 되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아, 엘비스 프레슬리는 이 나이에 죽은 거구나. 아무리 짧고 굵은 삶이라는 게 있다고 해도 너무 떠나기 싫었겠다. 팬들도 너무 보내기 싫었겠다. 그래서 그냥 만들기로 했지 뭐. 엘비스 샌드위치를.”


“근데, 엄마는 엘라 피츠제럴드를 제일 좋아하잖아.”


“그렇지.”


“근데, 엘라 피츠제럴드 기일에는 왜 뭐 안 해?”


“페이퍼 문은 매일매일이 엘라 피츠제럴드 데이야.”


“언제부터?”


“만들려고 했을 때부터.”


“난 왜 몰랐어?”


“너 태어나기 훨씬 전이니까. 그리고 매일매일이 기념일이니까 티가 안 나는 거야.”


“말이 안 되는 거 같은데.”


“아까 내가 기념일이 뭐라고 했어. 기념인은 말이 되는 걸 하는 날이 아니라니까.”


“치, 엄마 이상해.”


And we can't build our dreams, On suspicious minds. (의심하는 마음으로는 꿈을 만들어 갈 수가 없어요)”


“뭐야, 그건 엘비스 노래잖아.”


“오늘은 엘비스 데이니까.”




엘비스 샌드위치를 다 먹은 지은은 천천히 카페테리아를 둘러보았다. 뚜껑이 닫힌 그랜드 피아노 위에는 <Let Me Be Your Teddy Bear>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목에 체인을 건 테디 베어 인형이 놓여 있다. 정원 반대편 벽에는 <Blue Hawaii>의 배경 같은 새파란 바다가 펼쳐진 하와이 사진이 붙어 있고, 그 앞 테이블에서는 <Jailhouse Rock> 무대를 방금 마친 듯한 검은 가로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청년 한 무리가 유쾌하게 떠들고 있다.


‘내가 지금 블루 스웨이드 슈즈를 신고 있다면 재밌었을 텐데.’


지은은 블루 스웨이드 슈즈를 신은 발을 하운드 독 컨시어지에게 쓱 내밀면 뭐라고 할까 궁금했지만, 동시에 엘비스 월드에 죽 치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페이퍼 문의 매일이 엘라 피츠제럴드 데이고 엘비스 데이는 단 하루인 것처럼, 지은도 윈터 원더랜드에 엘라 피츠제럴드를 찾는 여행 중에 엘비스 월드에는 딱 하루만 머물러야 할 것이다.


카페테리아에서 나온 지은은 바로 호텔 정문으로 향했다. 방에 다시 올라가 챙길 짐도 없었다. 컨시어지 데스크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비어 있었다. 지은은 주머니 들어 있던 201호 열쇠를 데스크에 올려놓았다. 딱히 작별인사를 건네지 않아도 하운드 독 컨시어지는 섭섭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은은 데스크로 돌아와 열쇠를 발견한 하운드 독 컨시어지가 “Jieun has left the building(지은이 호텔을 떠났다).”이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하트브레이크 호텔을 떠났다.

“Elvis has left the building(엘비스는 공연장을 떠났어요).”은 엘비스의 공연이 끝나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관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했던 안내 멘트였는데, 미국에서는 공연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관용 표현이 되었다고 한다.


Winter Wonderland _elvis sandwitch.jpg ChatGPT가 그려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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