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크를 눌러 음악을 들으면서 읽으면 더 좋습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넓은 평원에는 아침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오렌지색 벽돌길이 뻗어 있었다. 지은은 다시 오렌지색 벽돌 길을 따라 걸었다. 하트브레이크 호텔로 올 때처럼 일단 노래 한 곡을 들으며 걸어 가 보기로 했다. 노래가 끝날 때쯤 다시 누군가를 만나게 되거나, 이정표나 갈림길이 나타날 것 같았다. 어떤 노래를 떠 올려 볼까 생각을 해보려는 순간 틱! 머릿속 주크박스가 켜졌다. 엘라 피츠제럴드의 <A-Tisket, A-Tasket>이 흘러나왔다.
A-tisket, a-tasket
따단 따다 딴딴
A brown yellow basket
약간 갈색 나는 노란 바구니 있잖아
I sent a letter to my mommy
엄마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On the way I dropped it
가는 길에 잃어버렸어
...
Oh, why was I so careless with that basket of mine?
아이참, 왜 칠칠치 못하게 바구니를 잘 챙기지 못했을까?
That itty-bitty basket was a joy of mine
그 조그만 바구니를 정말 좋아했는데
A-tisket, a-tasket
따단 따다 딴딴
I lost my yellow basket
내 노란 바구니를 잃어버렸어
Won’t someone help me find my basket?
누가 바구니 찾는 것 좀 도와주지 않을래요?
And make me happy again, again
내가 다시 행복해질 수 있게요
지은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주크박스는 지은이 바로 노란 박스를 잃어버린 꼬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분명하다. 그런데 기억을 잃었던 레그바와 마찬가지로 지은은 잃어버린 노란 바구니가 무엇이었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나를 행복하게 했었던 것. 그런데 지금은 없는 것... 대체 뭘까?’
행복이라는 감각을 잃어버린 시점은 정확하게 기억한다. 엄마는 재즈바 개업을 준비하는 친구를 도와주러 하루만 자고 오겠다고 나갔을 뿐이었는데 몇 시간 후 뉴스 화면에 나온 고속도로 5중 추돌사고 사망자가 되어 있었다. 충격과 슬픔의 해일이 지나간 곳에는 뚜렷한 형태의 불행이라기보다는 뭐라 딱히 규정하기 어려운 황량한 폐허가 있었다. 뻘에서 걸어본 적은 없지만 그런 느낌일 것 같았다. 걸음을 멈추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래로 빠져 들어갈 것 같은 느리지만 위협적인 하강감은 언제나 지은을 소름 끼치게 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걸었다. 척, 척, 찐득한 진흙이 발바닥에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소리는 언제나 지은을 따라다녔다.
‘그런데 엄마가 노란 바구니였다면 다시 찾을 길이 없잖아.’
지은은 벚꽃처럼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행복 말고, 일상을 채우고 있던 행복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할 때는 무엇이 이 상태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니까. 애초에 행복하다는 것조차 모를 때가 더 많으니까. 잃어버리고 나서야 알게 되는데,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모르니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은은 어린 시절이 행복했었다고 기억한다. 대단히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형편이 어렵지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면 젊은 여성 혼자서 카페를 운영하면서 딸을 키우는 형편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을 텐데 혜원은 한 번도 지은에게 팍팍함이나 고단함을 느끼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혜원의 능력이기도 했고, 혜원과 지은 두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 때문이기도 했다.
혜원과 지은의 공통점은 세상과 남들에게 대한 무관심이었다. 그것이 기준이건, 유행이건, 시선이건. 어린 지은은 옷이던 장난감이던 여행이던 또래들 사이에서 자랑거리가 될 만한 것에는 일체 관심이 없었다. 지은이 유일하게 욕심을 냈던 것은 음반이었는데 음반 욕심에 있어서는 혜원을 따라갈 수 없었다. 혜원은 집과 카페 '페이퍼 문'을 음반으로 가득 채웠다. 오로지 좋아하는 음악으로 가득 찬 자신만의 작은 왕국을 가꾸는 것만이 혜원의 관심사였고, 혜원의 왕국에서 지은은 여왕의 유일무이한 계승자였다. 혜원은 지은의 시험 기간이 다가오든 말든 이 계절에 이 날씨에 어울리는 음악을 들어보라고 권하는 것이 올바른 왕세자 교육 방향이라고 믿었고, 지은의 성적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요즘 어떤 가수를 좋아하고 어떤 음악을 듣는지는 수시로 물었다.
혜원의 왕국이 사라졌다고 해서 지은이 음악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은은 늘 음악을 듣는다. 회사에서 업무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지은의 귓가에는 음악이 흐른다. (사실 일을 하는 동안에도 지은의 머릿속에서는 자주 음악이 흘러나온다) 소장하고 싶은 음반이 생기면 바로 사고, 스트리밍 서비스가 생긴 이후로는 사실상 못 듣는 음악이 없다. 지은에게는 딱히 직업으로 음악을 하고 싶었다가 가정 형편 때문에 포기했다는 흔하디흔한 사연조차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음악을 듣는 게 좋고, 서로 어울리는 음악을 찾아서 플레이리스트를 만드는 게 재미있고,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떠오르는 스토리에 상상을 싣고 둥둥 떠 있는 게 행복할 뿐이다. 굳이 가장 비슷한 직업을 찾자면 DJ가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DJ가 되려면 먼저 되어야 하는 연예인이나 아나운서 중 어떤 것도 지은의 꿈이었던 적은 없다. 그 시절과 지금의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음악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고, 지금은 갑갑한 일상의 유일한 도피처가 음악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을 계속해 보아도 딱히 잃어버린 것도 아직은 떠오르지 않았다.
“Oh, why was I so careless with happiness of mine?”
(아이참, 왜 칠칠치 못하게 내 행복을 잘 챙기지 못했을까?)
지은은 장난스럽게 개사한 구절을 한숨을 내쉬듯 불러보았다. 그러자 머릿속 주크박스는 지은을 놀리듯이 엘라 피츠제랄드의 다른 노래의 한 구절을 툭 내뱉었다.
Look at me...
내 꼴 좀 보라지...
I’m as helpless as a kitten up a tree
나무에 매달린 아기 고양이처럼 대책이 없어
주크박스의 도발에 순간 헛웃음이 나왔지만, 엘라 피츠제랄드가 부르는 <Misty>의 아련하면서도 따뜻한 멜로디가 온몸에 스며들었다. 노래를 따라 부르는 지은의 눈동자에는 맑은 눈물이 얇게 덮여갔다.
And I feel like I'm clingin' to a cloud
구름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
I can't understand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I get misty, just holding your hand
마음이 아련해져, 네 손만 잡았는데
Walk my way
내게로 와줄래
And a thousand violins begin to play
수천 대의 바이올린이 연주를 시작해
Or it might be the sound of your hello
아니면 너의 인사소리일까?
That music I hear
내가 듣는 그 음악
I get misty, the moment you're near
마음이 아련해져, 네가 내 곁에 있으면
Can't you see that you're leading me on?
네가 나를 이끌고 있잖아
And it's just what I want you to do
그게 바로 내가 바라는 거야
Don't you notice how hopelessly I'm lost
내가 얼마나 절망적으로 길을 잃었는지 모르겠어?
That's why I'm following you
그래서 내가 널 따라가고 있잖아
On my own
혼자서 말이야
When I wander through this wonderland alone
이 원더랜드를 혼자 떠돌면서
Never knowing my right foot from my left
사실 오른발과 왼발조차 구분 못하겠어
My hat from my glove
모자와 장갑도 헷갈려
I'm too misty, and too much in love
너무 아련하고, 깊은 사랑에 빠진 것 같아
Too misty
너무 아련하고
And too much
너무나 너무나
In love
사랑에 빠져 있어
‘아!’
지은은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를 모자와 장갑도 헷갈리는 원더랜드에서 혼자 떠돌게 한 ‘당신’은 바로 ‘음악’이구나.‘
가장 좋아하는 <Winter Wonderland>로 시작해, 페이퍼문에서 혜원과 같이 들었던 오래된 팝송들 말이다. 어떤 순간에도 이들과 사랑에 빠져 있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행복했던 시간에도 행복이 떠나갔다고 느꼈던 시간에도 이들은 늘 지은이 숨 쉬는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엄마와 함께 사라진 것은 음악이 아니라 음악을 대하는 지은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내 세계는 변한 게 없는데, 나만 변해서 NPC가 돼버린 걸까.’
나 자신의 세계에서조차 NPC가 되어 버린 것 같아 잠시 부끄럽고 슬펐지만, 한편으론 어떻게 변했건 자신을 떠나지 않고 변함없이 ‘숨’이 되어 준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마치 시답지 않은 잡생각인양, 일상의 틈 속에 꾸겨 넣고 스트레스받을 때만 쪼르르 달려가서 엄마 몰래 불량식품을 먹는 아이 같은 표정으로 이들을 계속 대하고 있었다는 미안함이 몰려왔다.
윈터 원더랜드의 미션은 음악이라는 존재들과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만나면서 그들과 함께 살아 있는 캐릭터가 되어가는 여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은과 혜원의 뮤즈였던 엘라를 찾는 퀘스트가 바로 지은 앞에 도착한 노란 바구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지은의 눈앞에 자욱하지만 엷은 빛을 내고 있는 안개에 싸인 숲이 나타났다. 지은은 저 아련한 안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