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
한국 문학 최초의 노벨상 수상, 또 다시 한강이 온다.
믿을 수 없이 기쁜 소식입니다.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했을 때는 이제야라고 말이 나왔고
'소년이 온다'가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에는 드디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문화 강국으로서 한국의 위상이 완성되고 깊이를 더하는 결정적 순간인 것 같아 전율을 느꼈습니다.
온 국민이 축하할 일이지만 내 나라의 경사는 특히 교민에게 더욱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비록 지구 반대편에 있지만, 오래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어렵게 구해 읽은 적이 있습니다.
고백하건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마치 벌건 대낮에 가위눌림을 경험하는 것처럼 읽는 내내 숨쉬기가 어려웠고 두통을 겪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강렬한 몸의 기억으로 더이상 다른 작품을 읽을 엄두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그 고통의 정체가 무엇이었을까.
지금에야 깨달았습니다.
그 정체는 폭력과 억압이었고 한없이 무력할 수 밖에 없는 개인이 가장 자기 파괴적인 형식으로 이에 저항하며 처절하게 몸부림 칠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습니다.
런던의 치료실에서 전쟁의 참상을 피해 온 이들의 트라우마를 생생하게 들어야 했을 때 이유를 알 수 없이 며칠을 앓았을 때와 같은 통증이었고,
독버섯처럼 피어나는 절망의 한가운데서 길을 잃었던 나의 20대가 느꼈던 괴로움이었습니다.
마치 작가가 ‘고통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가차없이 느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픈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무력감이나 무감각보다,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살아있음을 확인받기 위한 고통이었으니까요.
마치 지독하지만 당연하게 퍼져있는 매연처럼, 군대식 교육과 강압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이라면 이러한 감각이 어떤 것인지 인지하지 못해도 몸으로 느껴보았을 것입니다.
고통의 정체를 대면하기 위해서는 ‘소년이 온다’를 읽었어야 했습니다.
한강님의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다시 용기를 내어 읽어보겠습니다.
또 다시 한강이 온다.
수상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