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태어난 나는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다. 아기는 꽁꽁 싸매 키워야 한다는 할머니의 개똥철학 덕분에 코끝에 바람만 스쳐도 감기에 걸리는 아이로 자랐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를 달고 살아 단골 병원에 전용 얼음주머니도 있었다. “우리 단골 또 왔나?” 의사 선생님의 인사였다.
봄바람에 비라도 내릴라치면 비상이었다. 몇 겹의 옷을 입고 목에 수건을 두른 다음 마스크를 하고 학교에 가면 얼마나 부끄럽던지. 귀하게 자란 티를 내냐는 친구들의 놀림은 필수 옵션이었다. 그러니 항상 바깥 온도 변화에 민감했다.
몸의 예민함은 마음의 민감함이 되었다.
곁에 있는 사람(심지어 화상 회의에서도)의 목소리, 표정, 뉘앙스, 그 미묘한 차이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한 공간에 있는 대다수가 몰라도 나는 알았다. 숨기고 있는 마음의 온도가 여실히 느껴졌다.
누군가의 미묘한 변화를 안다는 건 몹시 피곤한 일이다. 동공의 움직일 때마다 상대의 마음 상태가 보인다. 지겹구나, 즐겁구나, 재미있구나, 듣기 싫구나…. 감정 변화가 파동이 되어 내 심장을 지나간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애써 숨긴 감정이 들켰다는 걸 아는 건 꽤 불쾌한 일이다. 그러니 모르는 척해야 한다.
얼마 전 지독한 독감으로 앓아누웠다. 꽁꽁 싸매고 다닌 모양이 무색하게 된통 앓았다. 아프면 드러누워 잠이나 잘 것이지 SNS를 열었다. 온라인 친구들이 업로드한 사진과 글 알림이 주르륵 떴다. 그중엔 동생의 것도 있었다.
“ㅇ월 ㅇ일” 날짜만 덩그러니 올라온 동생의 프로필을 보고 아픈 중에도 마음을 앓았다.
아픈 나를 살피려고 2층 우리 집으로 올라온 엄마를 보자 눈물이 펑펑 솟구쳤다. 영문도 모르고 당황한 가족들을 향해 “ㅇㅇ이 ㅇ월 ㅇ일에 병원 가는 거죠?” 했다. 혼자 사는 동생이 보호자도 없이 홀로 병원에 가는데 동행해주지 못할 비루한 몸뚱이가 원망스러웠다.
“네가 너무 아파서 아무 말도 안 한 걸 어찌 알았어? 응? 그걸 어떻게 알고 마음고생까지 하는 거야.” 걱정과 혼란이 가득한 엄마는 내 등을 쓸고 또 쓸었다.
이런 식이다. 누군가 귀에 속삭이거나 보여주는 게 아니다(신기는 없다). 그냥 느끼고 이미 들었던 정보와 연결해 기가 막히게 눈치챈다. 삶이 몹시 고단하다.
마음의 온도를 28도 유지하려 애쓴다. 조금은 서늘하고 무심한 온도, 뜨겁지 않고 미지근하고 체온보다 낮아야 한다. 그럴 때라야 평안하다. 그 평안을 위해 날마다 뜨거움과 차가움을 퍼내고 보탠다.
진정 사랑하는 이들에게 신경을 쏟고, 스치는 인연은 흘려보낸다. 내게 남은 여러 감정의 의미를 탐구하고 필요한 것만 간직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비극에서 한 걸음 떨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취사선택해 최선을 다한다. 전부를 공감하지 않는다. 네 것과 내 것을 구분한다. 그래야….
그 온도, 28도에 맞춰진다. 서늘하게 뽀송해진다.
Magda Ehlers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3090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