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다.”
2004년을 씹어 먹은 명대사였다.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의 철수가 수진의 술잔을 넘치도록 채워주고 건넨 말은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당시 20대였던 나는 철수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수진이 슬펐다. 사랑하는 남자를 잊는다는 게 잃어버리는 것과 뭐가 다를까 하며 펑펑 울었다.
지금의 나는 철수가 아프다. 나만 기억하는 너를 붙들고 살아가는 심정이 어떠할까,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괴롭다.
마흔 중반을 넘어가며 수많은 이별을 대비하며 살아간다. 노년에 들어선 양가 부모님, 친인척들, 그리고 남편과 나…. 무엇이 더 아프고 덜 아플지, 그 무게를 달아보는 것이 무의미한 고통일 테다.
20년 전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선임의 아버지는 사고로 어린아이가 되셨다. 많은 기억이 지워져 천진한 아이처럼 되어버린 아버지를 돌보던 선임의 말이 기억난다.
“난 아버지가 아무것도 몰라서 다행스러울 때도 있어. 세상의 고통도, 추악함도 모르고 주어진 하루를 아이처럼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이 행복해 보이거든. 바라보는 우리는 가끔 슬프지만….”
지워버린 바람보다 지워진 사람이, 떠나간 사람보다 떠나보낸 사람이 감내할 일이 더 크고 어렵다. 그러니 남겨질 애틋한 이들을 위해 조금 더 다정한 순간들로 채워가야지. 남겨졌을 때 후회가 털끝만큼이라도 작아지게 조금 더 따뜻해야지. 지우개가 없는 우리들의 추억을 위해.
Jonathan Goncalves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176878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