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완행열차

by 에벌띵

국민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한 울타리 안에 살던 동갑내기 사촌 둘, 나보다 한 살 많았던 사촌 언니, 그리고 나는 할머니를 따라 다른 도시에 살던 고모네로 향했다. 지금 생각하면 민폐가 따로 없다 싶지만, 고모에겐 친정 엄마였던 할머니 권력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네 개의 좌석이 마주 보고 있던 완행열차를 탔다. 아이 넷을 데리고 다니기에 버스보다는 기차가 나을 거라 여겼던 모양이었다. 온갖 역에 정차하는 기차였는데 한창 까불거릴 나이였던 아이들에겐 얼마나 지겨운 시간이었을까.


기차가 출발하고 30분도 되지 않아 나는 할머니를 따라나선 걸 후회했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나와 달리 활발했던 사촌들의 떠드는 소리와 장난이 힘들었고, 다정이란 말과는 거리가 멀었던 할머니는 무서웠다.


아무리 조용히 하라 일러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세 아이를 야단친 후 할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니는 내를 닮아가 점잖네.” 좋은 건 모조리 당신 유전자 덕이라 믿었던 할머니다운 칭찬이었다는 걸 나이가 들어서야 알았지만, 여덟 살이었던 나는 할머니의 칭찬에 부흥하려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았다.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


그렇게 먼 거리를 엄마, 아빠도 없이, 동생들도 없이 혼자 간 건 처음이었다. 엉덩이를 뒤로 한껏 빼며 안 갈 거라고, 고모네 가기 싫다고 울먹였던 나에게 엄마는 아마도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평소엔 손주들에게 엄하고 완고했던 할머니가 모처럼 한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웠을 테고. 반 강제로 떠난 고모집 방문이 내게는 극기 훈련이었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2박 3일 정도 고모네서 지냈던 걸로 기억한다. 이미 세 아이를 키우는 고모 집에 우리가 더해지니 아이만 일곱이 되었다. 할머니를 꼭 닮아 다정함이라곤 없던 고모의 눈치를 얼마나 봤던지.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던 나는 고종사촌 동생들을 돌보며 고모의 마음에 들려 애썼다.


휴대전화는커녕, 비싼 시외전화 요금 때문에 집에 전화 한 통 할 수 없던 나는 밤이면 엄마가 그립고 아빠가 보고 싶어 혼자 훌쩍였다. 우는 게 들키면 혼날까 눈물만 주르륵 흘리는 게 고작이었는데, 내가 우는 걸 눈치챈 고종사촌 동생이 제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 “언니 울어!” 하는 바람에 들키고 말았다.


고모와 고모부가 우리를 다시 기차역에 데려다주었다. 3일 동안 수척해진 내 얼굴을 고모부는 안쓰러운 듯 쓰다듬으며 “다음 방학에도 놀러 와라”하셨는데, 그 말에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네….” 지키고 싶지 않은 답을 착한 아이답게 했지만, 절대 그럴 일은 없기를 바랐다.


더디고 느린 완행열차를 타고 왔던 길을 거꾸로 달렸다. 사촌들은 더 시끄러웠고 할머니의 노성은 더 커졌지만 상관없었다. 갈 때는 쌩하니 달리더니 올 때는 굼벵이 걸음인 기차 창가에 매달렸다. ‘곧 엄마를 보겠지? 아빠가 나를 보면 꼭 안아 주겠지?’하며 마음 졸였다.


기차역에 아빠가 마중 나와 있었다. 저 멀리 점처럼 보일 때부터 알아봤다. 내내 조용하기만 했던 나는 아빠를 향해 내달렸다. 두 팔 벌린 아빠에게 털썩 안기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재밌게 잘 놀고 왔나?” 다정한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젠 집에만 있을래요. 다른 데 안 가고 싶어요.”물기 가득한 목소리를 내는 내 머리를 아빠는 수 없이 쓰다듬었다.

“그래라. 아빠도 우리 딸 보고 싶어서 혼났다.”


그 후 사흘을 앓았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착한 아이 노릇을 하느라 용을 썼던 후유증을 호되게 지났다.


지금은 추억이 된 시간. 그날의 할머니는 하늘의 별이 되셨고, 고모는 할머니가 되었다. 사촌들과 나는 그 시절 고모의 나이를 지난 어른이 되었다. 시간이 완행열차처럼 느리게 갔으면 좋았을 텐데, KTX속도로 지나버렸다. 아쉬움과 그리움이 가득한 밤이다.



Felix Mittermeier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283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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