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영국을 비롯 몇몇 영연방국가는 좌측통행을 한다. 마차를 교통수단으로 삼던 시대에 마부가 오른손으로 채찍을 휘둘렀기 때문에 왼쪽에 앉는 것이 안전했고, 좌측통행이 반대편 차량을 보기에 유리했던 이유라고 한다.
내가 영국에 머물던 시절이었다. 일평생 좌측통행 국가에서 살던 나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고개가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돌아갔다. 왼편에서 오는 차를 먼저 피해야 했으니까.
영국에 떨어졌다고 그 습관이 어디 가지 않았다. 나는 왼쪽을 먼저 살폈다. 그러다 오른쪽을 보고 오른쪽을 보고 다시 왼쪽을 봐야 했다. 어찌나 헷갈리던지.
당시 나에겐 오래 사귄 영국인 친구가 있었다. 주로 옥스퍼드에 머물던 내게 친구는 함께 여행을 하자 했다. 차 없이 가기 어려운 영국의 구석구석을 보여주겠다는 친구의 제안을 당연히 받아들였다.
완벽한 의사소통을 아니어도 우린 그럭저럭 잘 지내는 사이였다. 미국식 영어를 쓰는 나와 영국 남부식 사투리를 쓰는 친구는 자주 ‘Pardon?’하며 되물어야 했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축적되는 pardon의 피로 때문이었는지 여행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대화는 줄었다. 내게 first floor(미국식)는 1층이었고, 친구의 first floor(영국식)는 2층이었던 차이만큼 간극이 생겨났다.
어느 날 도보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때였다. 많지 않은 횡단보도를 찾기보다 무단 횡단을 선택하기 십상인 영국도로를 잽싸게 건너는 일이 내게는 미션 같았다. 도로를 건너자는 친구의 말에 긴장한 나는 무의식적으로 왼쪽 도로로 고개를 먼저 돌렸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친구가 충격적인 말을 뱉었다.
“Are you a fucking idiot?!”
그냥 바보도 아닌 돌대가리냐고 분노를 터트린 친구는 길을 건널 때마다 왼쪽을 먼저 보는 이유가 뭐냐고 했다. 차는 오른쪽에서 오는데 바보가 아니고서야 왼쪽을 먼저 보는 게 맞냐고 얼굴이 벌게지도록 소리쳤다.
모욕적인 친구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결국 그간 꾹꾹 눌러 참은 화를,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영국 해변가 도로에서 터트리고 말았다.
“너야 말로 멍청한 거 아니야? 나는 이 개떡 같은 영국에 오기 전까지 평생을 한국에서 살았어. 한국은 뭣 같은 너네 나라처럼 좌측통행이 아니라 우측통행인 나라야. 우린 왼쪽을 먼저 봐야 살아남을 확률이 높고 나는 걸음마를 할 때부터 횡단보도를 건널 때 왼쪽을 먼저 살피라고 교육받았어. 그런데 내가 영국에 왔다고 단번에 바뀌겠어? 그러는 너는? 너도 한국에 왔을 때 오른쪽 먼저 봤잖아. 매번, 항상. 그래도 난 너한테 돌대가리라고 하지 않았어. 단 한 번도!! 왜냐고? 우린 다르니까. 우리가 하는 말이 다른 것처럼 문화도 다르고 규칙도 다르니까!! 그런데 넌 왜 나한테 틀렸다고 하는 거야? 달라서 헷갈리는 나한테 돌대가리라 하는 너는 얼마나 천재적이야? 응? 그런 너는 왜 한국말을 못 해서 매번 내가 영어로 말하고 알아들어야 하는 거냐고!!!”
(화가 나면 말이 막히거나 유창 해지거나인데 그때의 나는 후자였다. 고구마 10개 먹고 막힌 듯 트이지 않던 영어가 술술 나와 말하던 나조차 놀라웠다.)
갑작스럽게 유창해진 내 언변에 기가 찬 듯 말이 없던 친구는 한참 후에야 먼저 쿨한 사과를 했다. 자신의 말이 심했다고, 여행 중 쌓인 스트레스를 그런 식으로 풀었다면서. 친구 없이 학교로 돌아갈 길이 묘연했던 나도 이내 사과했다.
그날 우린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먹고 마실 것을 구입해 숙소에 머물렀다. 밤새 그간의 어려움을 나눴고 우리의 다름을 공유했다. 문화와 언어의 차이가 만들어낸 오해가 깊었다. 동서양이라는 거리만큼 달랐던 사고방식도 놀라웠다. 단 한 번도 동양인, 특히 한국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 한 적도 없다던 친구는 제법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우리의 차이를 설명하지 않고 참기만 했던 나의 미련은 배려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밤이었다.
이후 우리의 여행은 순조로웠다. 불평이 올라올 때마다 우리의 다름을 먼저 떠올렸고, 그런 덕에 상대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돕거나 기다렸다. 다른 게 틀린 건 아니라는 인식 하나가 만든 기적이 여행 내내 이어졌고 우린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Elīna Arāja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3317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