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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벌띵 Oct 09. 2023

칼을 품고 사는 사람의 비극

이십 대 중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2002 월드컵을 치르기 전인지 후인지는 모르겠다. 요즘이야 한국 영화가 세계를 뒤흔들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할리우드가 모든 영화 산업을 장악하고 있었다. 블록버스터 영화를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할리우드식 스토리 전개가 별로였다. 내 감성은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던 러브레터, 북한 저격수와 대한민국 특수비밀 요원의 사랑과 민족의 아픔을 그린 쉬리, 학살당하는 유대인을 구하는 사람의 실화를 담은 쉰들러 리스트 같은 영화에 찰떡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논리와 이론보다 감성이 앞서는 사람이다 보니 영화를 보고 나온 후에도 한동안 도취된 감정을 누르지 못해 영화에 대한 리뷰를 남기곤 했다. 내 관점, 내 감성, 내 가치관에 따라 쓴 매우 주관적인 글이었지만,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을 최대한 배려한 글이었다.



술 마시는 회식보다 영화나 연극을 보러 다니길 좋아하던 직장동료들과 영화를 보고 나온 밤, 차오른 감상평을 게시했다. 할리우드 영화에 밀려 사장되기엔 아까운 한국 영화를 많은 사람이 보고 응원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던 글에 댓글이 달렸다.

'글이 유치하기 짝이 없군요. 근거도 이론도 없는 감상평, 감정에 호소하는 모양이 초등학생 수준에 불과합니다.' 폄하와 비웃음이 가득한, 열몇 줄에 달했던 댓글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칼 춤추는 망나니가 쓴 글에 내상을 입었다.

그 후로 10년 넘게 나는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했다. 뭘 써도 유치하고 감정에 호소하는, 초등학생 수준이라던 익명의 망나니 목소리가 들린 탓이었다.



글에도 말에도 칼을 품고 휘두르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 생각한 건지, 상대를 무시하고 깔보는 게 습관이 된 건지 알 길이 없다. 그들의 대상이 된 사람은 휘두른 칼에 속절없이 당한다. 어느 정신과 의사가 그랬다.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대다수라고. 맞다. 글로, 말로 내상을 입은 피해자는 가해자를 탓하기보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 생각하고 스스로를 괴롭힌다. 나의 무엇이 잘못된 걸까, 어떤 점이 상대를 불편하게 했을까, 과거를 곱씹고 자신을 볶아댄다.

이런 현상을 두고 많은 심리학자들이 연구했다. 뻔뻔한 가해자와 좌절한 피해자의 모양이 영리한 학자들 눈에도 거슬렸던 게 분명하다. 그리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그들은 사실을 밝혀내고야 말았다.


투사 : 자아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욕망이나 동기가 타인에게 귀속화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방어기제의 일종
                          교육학용어사전


어렵게 설명된 투사를 쉽게 말하면 제 몸에 묻은 똥을 제대로 보고 털어낼 힘이 없어 남의 몸에 묻은 먼지를 욕하는 행동이다. 결국 타인에게 뱉은 악담은 자신의 약점이자 부정적 면모라는 걸 만방에 알리는 것과 같다.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나는 내게 욕이나 다름없는 댓글을 남긴 사람을 이해했다. 그는 아마 평소에 누군가로부터 '유치하고, 비논리적이고, 초등학생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내 글은 단지 재수 없게 걸려들었을 뿐이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욕하는 사람 앞을 지나간 것에 불과했다.


말도 마찬가지다. 육아를 하겠다고 퇴직을 선택한 나에게 '밥버러지'라 욕 한 시어머님은 스스로를 그렇게 여겼다 생각한다. 평생 사회생활이라고는 해보지 않은 자신을 무능하게 여긴 시점이 있었을 테고, 그 상처를 그러 안고 살다 전문직 며느리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기쁨과 씁쓸함이 공존하지 않았을까. 그러다 잘난 며느리가 일을 그만두고 자신처럼 아이를 키우겠다 선언하니 무능하다 여겼던 자신이 며느리를 통해 투사되었다. '밥버러지'는 시어머니 자신을 향한 칼이었다.



타인이 휘두른 칼에 맞고 멀쩡하긴 어렵다. 이런저런 공부와 경험으로 단단해진 나도 여전히 상처를 입고 피 흘린다. 하지만 그걸 그러안고 사는 기간이 대폭 줄었고, 내 문제로 만들지 않는 힘이 생겼다. 더불어 그런 말과 글을 쓰는 사람의 열등감을 바라볼 마음의 여유가 내겐 있다.


당신에게 비난과 조언을 가장한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 말에 마음이 상하고 흔들리는 자신이 한심한가? 염려하지 말길 바란다. 당신이 들은 그 말은 당신의 문제 혹은 잘못이 아니다. 당신에게 그 말을 한 '그 사람'이 가진 열등감이고 단점일 가능성이 99%다.


조언, 충고, 평가, 판단의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날 때 기억하자.

'아, 저 사람이 저 문제로 곤란을 겪는 중이구나. 누군가에게 저런 비난을 듣고 있구나.' 이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측은지심이 생기는 자신을 발견해 보라. 꽤 괜찮은, 품 넓은 자신이 선물처럼 찾아오는 순간 인정해라. 당신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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