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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벌띵 Oct 14. 2023

너의 바이올린, 나의 바이올리니스트

딸은 꽤 오랜 기간 현악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초등 4학년 때부터였으니 올해로 오 년째, 오는 12월에 열릴 다섯 번째 정기연주회를 준비하는 중이다. 오케스트라가 연습하는 시간에 밖으로 흘러나오는 연주곡을 들으면 그 감회가 새롭다. 1/2 사이즈 바이올린도 크다 싶던 때가 어제 같은데, 어느새 4/4 사이즈를 바이올린도 아무렇지 않게 다루는 딸이 떠오르면 코끝이 시큰거린다

딸이 바이올린을 처음 배운 건 초등 1학년 방과 후 수업을 통해서였다. 그때 선생님이 얼마나 엄격했던지 바이올린 수업에 참여하고 한 달 만에 그만 배우고 싶다 알렸다. 자세부터 운지법까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아이를 거칠게 대했다. 선생님의 과도한 열정과 전공자가 아니라는 핸디캡이 뒤섞여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었나 한다. 구비해 둔 바이올린이 아까웠지만 즐거워야 할 배움이 눈물바람으로 끝나선 안된다는 생각에 딸의 청을 들어주었다.


클래식 연주회를 좋아하는 나를 어린 시절부터 따라다닌 딸은 사실 바이올린 보다 비올라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첼로와 비올라 연주곡을 유난히 좋아하는 내 영향인지 비올라를 배우면 안 되냐 졸라댔다. 하지만 주변에 비올라를 배울만한 곳도 마땅치 않은 데다 비올라만을 위한 연주곡도 많지 않다는 이유로 딸에게 바이올린을 권했던 게 방과 후 수업으로 이어졌다.


방과 후 수업을 그만두고도 현악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딸과 나는 또다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두고 갈등했다. 그러다 딸이 초등 2학년이던 가을,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의 한국 순회공연 소식이 들렸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티켓을 예매하고 우린 연주회로 향했다. 그날 우리는 진정 비올라에 흠뻑 빠졌다. 소프라노 같은 바이올린과 베이스를 닮은 첼로 그 사이 어디쯤, 메말라 퍼석거리는 감성에 흩뿌린 보슬비 같은 비올라를 사랑하지 않을 방도는 없었다. 게다가 세계적 비올리스트의 연주는 딸을 완전히 사로잡아버렸다. 연주회 사이 인터미션 때에 아이는 비올라를 배우기로 결정했다는 의사를 굳게 밝혔다.


연주회가 끝난 후 용재 오닐의 특별 사인회가 열렸다. 그의 CD를 챙겨 들고 딸과 나는 길게 늘어선 행렬에 합류했다. 용재 오닐에게 가까워질수록 딸은 상기되고 긴장했다. 자신이 비올라를 배워도 될지, 어떻게 배우는 게 좋은지 꼭 물어보고 싶다던 딸은 세계적 연주자 앞에 서자 얼어붙고 말았다.


용재 오닐은 딸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라 당부했다. 비올라 연주자로서 느끼는 현실적 어려움을 귀띔해 주는 그에게선 선배 연주자의 진지함이 흘러넘쳤다. 바이올린을 충분히 배운 다음 비올라로 전향해도 늦지 않다 일러주며 자신의 연주를 듣고 비올라를 배워보리라 다짐한 딸에게 깊은 감사를 전했다. 그가 영어로만 이야기하는 통에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한 딸은 울 듯 말 듯 , 나라 잃은 백성 같은 표정이었다는 건 안 비밀이다.


용재 오닐의 애정 어린 몇 마디 덕이었을까, 몇 날 며칠 거듭된 고민 끝에 딸은 바이올린을 다시 배워보기로 결정했다. 딸의 결정만 기다린 듯, 맞춤한 선생님이 나타났고 딸은 성실과 열심을 다해 익혔다. 차곡차곡, 성실한 성격답게 실력을 쌓아 오케스트라에도 합류했다. 세컨드 바이올린으로 참여하는 첫 연주회는 소박하게 열렸다. 단원들 가족만 초대한 연주회는 표현할 길 없이 아름다웠다. 활은 제대로 그을까 하던 내 염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댄서의 몸놀림처럼 유려

한 움직임이 나를 압도했다. 바로크, 로코코, 근대와 현대를 넘나드는 마법 같던 그날은 지금도 내 생애 최고의 연주회로 남았다.

그 후로 크고 작은 무대에서 오케스트라의 활약이 이어졌다. 무대에 서는 긴장감과 재미에 흠뻑 빠졌던 딸은 세컨드 바이올린에서 퍼스트 바이올린으로 성장했다. 전공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나름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는 딸의 바이올린도 연습용에서 연주자용으로 바뀌었다.


그런 딸이 얼마 전, 이번 정기연주회를 마지막으로 오케스트라 활동을 그만두겠다 선언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 더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할애하고프다는 이유였다. 아깝지 않겠냐는 내 물음에 딸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오케스트라는 그만둬도 수업은 계속 받을 테니 걱정 말라는 말을 들으니 마음 한편 들었던 아쉬움이 덜해졌다.


우린 딸이 들려주는 연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데 익숙해졌다. 연주회를 준비하느라 12월이 주는 쓸쓸함도 아쉬움도 잊었다. 연주회가 끝난 후 들뜨고 아쉬운 소회를 나누며 내년 연주회를 기약하던 즐거움은 새해를 위한 기대이기도 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이제 끝일 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눈물이 솟구칠 것 같다. 서운한 마음은 내년 한 해 하고 싶은 일을 충분히 한 다음 다시 돌아가면 어떠냐는 제안으로 이어질 듯해 꾹꾹 누른다.


고단한 인생길에 딸의 절친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던 악기가 바이올린이었다. 평생 함께 하며 이런저런 감정을 나누고 표현하는 친구이길 바랐고 그 마음은 여전하다. 감정의 소용돌이가 칠 때면 활을 긋는 딸에게 바이올린은 이미 묵묵히 함께 걷는 친구인 게 틀림없다. 그래, 그거면 됐다. 오케스트라로 다시 돌아가든 말든, 오롯이 딸의 몫으로 넘겨주고 나는 마지막 연주회를 준비하는 딸에게 박수와 응원을 보내야겠다. 마지막 연주회에서 브라보, 브라비!!를 외치며 그간 딸의 노고에 찬사를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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