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벌띵 Oct 22. 2023

못된 무 같으니라고!

오케스트라 연습을 마친 딸과 대문을 들어서니 현관문을 열고 엄마가 나오셨다. 언제나처럼 환히 웃으며 우리를 반기시는 얼굴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언 듯 내비쳤다. 엄마와 가장 오래 산 맏딸은 엄마 솜털도 읽어내는 능력이 있다. 나도 마주 웃으며 엄마 앞에 섰다.

"다른 게 아니고 지난번에 해준 무김치가 매워서 새로 담갔어. 똑같은 씨를 한 날에 심었는데 어떤 건 부드럽고 어떤 건 맵고, 매운 건 껍질부터 질긴 게 못돼 먹었어." 아버지와 일구신 작은 텃밭에 심어 키운 무를 뽑아 자식들 먹일 김치를 담그며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온 정성을 다하셨을 테다. 갖은양념을 아끼지 않고 버무렸을 무가 껍질도 세고 매운맛까지 뿜어댔으니 속이 얼마나 상했겠나. 엄마 애를 끓인 무는 죄도 없이 못돼먹은 놈이 되고 말았다. 엄마의 그 마음을 알면서도 나는 '못된'이란 글자에 마음이 꽂혔다. 그래서 그만

"저도 살려고 그랬겠죠. 못된 게 아니고 자기를 지키려다 보니 질기고 매워졌을 거예요."라며 엄마 말에 토를 달고 말았다.

순하고 어진 엄마는 뼈 있는 내 말에도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네 말이 맞다. 무도 살아남으려고 그랬겠구나." 하신다. 독하게 살아남은 녀석을 기어이 뽑아 김치로 만들었으니 약처럼 먹어야겠다 하고 우리 모녀는 크게 웃었다.


김치를 받아 들고 이층으로 올라와 한 조각 입에 넣었다. 풋풋한 내음과 알싸한 맛이 한가득이었다. 엄마만의 비법이 들어가는 김치 양념은 언제나 최고다. 가족 모두가 인정하는 맛이래도 나는 잊지 않고 엄마에게 '양념 간이 맞춤이라 입맛에 딱 맞고 폭 익히면 무의 알싸한 맛도 사라져 밥도둑이겠다'라는 말을 전했다. 매운 무 때문에 속상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은 엄마는 소녀처럼 함빡 웃었다.


안도하는 엄마를 뒤로하고 나는 책상에 털썩 앉았다. '못된 무'가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무가 매워서 맛이 없을까 봐 속상하셨어요?' 했어도 되었을걸, 꼬투리 잡듯 한 내 처신이 못마땅했다. 꿀꺽 삼켜지지 않은 '못된'이 목에 걸려 껄끄럽고 불편했다.


'못된'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여섯 살 때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시작했고 여섯 살이던 내가 세 살 동생을 돌봐야 했던 해였다. 우리 아침을 챙기고 집을 나선 부모님은 저녁 여섯 시가 넘어서야 귀가했고 그 사이 나에겐 동생을 돌볼 중책이 맡겨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작 여섯 살짜리, 아기 꼴을 겨우 면한 나이였을 나를 엄마는 믿으셨다.

똑똑하고 똑 부러지는 성격이긴 했다. 집안 어른들은 돈 계산이 필요한 심부름은 꼭 나를 시키곤 했으니 셈도 빨랐던 것 같다. 올곧은 성격에 거짓말하는 법도 없었다. 그래도 세 살, 여섯 살 아이이었다. 한 울타리에 사는 조부모와 백모, 숙모가 없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랬다. 부모님은 한 울타리에 사는 다른 가족들이 우리 자매를 돌봐 줄 거라 굳게 믿었다.


아이들만 남겨진 세상은 세렝게티다. 물보다 진한 피도 보호자가 있을 때 그 능력을 발휘한다는 걸 나는 여섯 살 나이에 알았다. 더군다나 피를 나눈 할아버지와 삼촌들은 집에 있지도 않았다. 겨우 할머니만 진짜 피 붙이었고 숙모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다. 할머니가 우리 자매를 챙기는 법은 없었다. 원래 그런 성격, 그런 분이었다. 할머니도 나 몰라라 하는 우리를 숙모들인들 챙겼을까. 부려먹기 좋은 내게 심부름을 시키고도 밥은 자기 자식들만 불러 먹였다. 가뜩이나 먹성 좋은 동생이 침을 뚝뚝 흘리며 쳐다봐도 모른 척 돌려 앉던 어른들을 기억하고 있다. 대청마루 끄트머리에서 손가락을 빨고 앉았던 동생 등을 모질게 한 대 때려 집으로 끌고 가던 나를 보며 숙모들은 그랬다.

"저 못된 거 봐라. 지 동생을 기어이 울려서 데려가네!"

숨길 기색도 없이, 자신들의 비겁함을 내 모진 성격으로 묻으려 했다. 두 귀에 내리 꽂히는 그 말을 듣고 여섯 살 계집애는 무얼 해야 했을까. 여섯 살 나는 입술을 악물고 동생 팔을 더 세게 끌었다. 애먼 세 살 동생에게 "언니가 다른 사람 밥 먹을 때 보지 말라 했어, 안 했어! 네가 거지야? 배고프면 언니한테 와서 밥 달라고 해야지, 왜 거기서 손가락 빨고 앉았어!!" 화를 퍼부었다.

우리 가족이 사용하는 작은 부엌에 들어가 곤로를 피웠다. 엄마가 미리 일러주신 대로 성냥불을 켜 석유곤로에 불을 붙이고 새벽에 엄마가 끓여 둔 국을 데웠다. 아랫목에 묻어 둔 밥을 가져와 동생 몫으로 푹 떠서 담고 마른반찬도 찬기에 담았다. 그사이 손을 씻고 앉은 동생 얼굴에 가득한 눈물자국이 눈에 들어찼다.

"이리 와." 죄 없는 동생 등짝을 내려친 게 그렇잖아도 미안한데 여려터진 세 살 동생이 내 눈치만 보고 쭈뼛거렸다. 수건 한쪽을 물에 푹 담가 비틀어 짠 뒤 동생 얼굴을 닦았다. 땟물이 묻어난 수건이 시커메질수록 말간 동생 얼굴이 드러났다. 우느라 말라붙었던 코를 닦아내니 동생이 해실 거렸다.

"언냐, 속땽해?" 혀 짧은 소릴 내며 나를 의지하는 동생을 꼭 껴안았다.

"다음부턴 그러고 있지 마. 언니가 밥 챙겨줄게. 엄마가 나한테 준 돈도 있으니까, 과자 먹고 싶으면 말하고, 알았지?" 달처럼 하얗고 포실 거리는 동생을 안으니 마음이 풀렸다.

"응, 난 언니가 됴아."

등짝을 때리고 팔을 끌어당겨서 울렸던 게 미안해지는 고백을 들으니 머쓱했다. 미안했다. 마음을 숨기려고 동생 밥그릇에 밥을 한 숟갈 더 퍼 담아 내밀었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 모자라면 언니가 과자 사줄게. 그리고 엄마 아빠 올 때까지 언니랑 그림 그리고 놀자. 언니가 종이 인형 만들어 줄게." 볼이 미어터지게 밥을 밀어 넣고 해실거리는 동생이 가여웠다.


여섯 살의 나는 동생과 세렝게티에 남겨진 초식동물이었다. 부모님이 돌아오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남아야 했던 아이는 못된 성미가 절실했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영리하게 굴어야 했다. 아이를 깔보는 어른에게 맞설 힘도 필요했다. 눈물도 잘 참아야 했다. 내 눈물은 그들의 조롱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되려 공격과 모함의 빌미가 될 뿐이었다.


못된 무 맛은 여섯 살 내 상처와 맞닿아 있었다.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았던 해를 보내고 나는 어른 아이가 되었다. 그날의 기억이 여전히 마음 한편을 차지한 채로 남았다. 세 살 동생은 이제 중년의 나이다. 나와 다를 바 없이 나이 들어가는데도 나는 동생을 볼 때마다 세 살 아이를 덧씌운다. 언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고 무섭다던 동생이 내 속을 벅벅 긁어댄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막냇동생이 "작은 언니랑 원수 져도 이상치 않다" 할 만큼이래도 나는 결코 동생을 밀어내지 못한다. 동생은 그랬듯 여섯 살 나도 동생 덕에 버텼다. 미운 구석이라고는 없이 순하게 웃던 세 살 동생에게 나도 의지했다. 등짝을 후려 맞고 울었던 동생은 정작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단다. 다행스럽고 아쉬웠다.


못된 무가 나를 여섯 살의 그 시절로 데려갔다. 꼭꼭 숨겨 놓은 기억을 꺼내게 하더니 눈앞에 좌르륵 펼쳐 놓기까지 했다. 아프고 서러웠던 순간들, 엄마 정이 그리워 언니 품을 파고들던 내 동생, 임신한 몸으로 아버지와 매일 출근해야 했던 엄마, 든든한 울타리가 되려고 온몸이 부서지게 일했던 아버지, 그리고 그 모든 걸 지켜보았던 내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오래 묵힌 필름을 영사기에 끼워 돌린 것 마냥....


나는 이 기억을 부모님껜 알리지 않을 작정이다. 그저 내 불편의 뿌리가 무언지 궁금했을 뿐이다. 이유를 알고 나니 해방감이 든다. 그럼 됐다. 충분히 만족스럽다. 그러니 굳이 엄마, 아버지껜 말하지 않으련다. 함구함으로 평안을 선물하련다. 중년이 된 동생에게 전화나 한 통해야겠다. 그때 언니가 등짝을 때려서 미안했노라고, 미리 챙겼으면 될 일을 나도 어려 미숙했다고, 그런데도 언니를 좋아해 줘서 고맙다고 전해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너의 바이올린, 나의 바이올리니스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