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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벌띵 Oct 26. 2023

제 마음을 이야기해도 될까요?

싫어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무난하거나 유순한 성격이라 그런 건 아니다. 워낙 집순이인 데다 혼자 사부작사부작하는 걸 좋아한다. 친구도 대부분 오래 사귄 이들이다. 마음을 내어주는데 인색한 반면 한번 내어준 마음을 거둬들이는 법은 없다. 거기에 타고난 장점이 하나 있는데, 내 눈앞에 앉은 사람의 장점을 잘 찾아낸다. 단점은 상대의 상처, 아픔으로 보일 뿐이다. 어쩌다 저런 말을 하게 되었을까, 어쩌다 저런 습관을 갖게 되었을까 생각한다. 신이 내게 거저 주신 달란트다.

남편이 "당신 눈 밖에 난 사람은 정말 문제 많은 사람인 게 틀림없어."라고 할 만큼 사람을 밀어내는 재주가 없다. 많은 경우 내가 아닌 상대가 나를 떠난다. 거기엔 나의 냉담한 표정과 말투가 한몫하지 싶다. 삶의 기준이 매우 확고한 면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생각한다. 어쨌든 내가 먼저 연락을 끊거나 떠나는 법은 99.9% 확률로 없다.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오늘의 글감 때문이다. 오늘 누군가와 언짢거나 지적받은 일이 있다면 내가 나의 편이 되어 하소연을 들어 주라는 글감을 받고 아무리 생각해도 걸리는 사람이 없다. 어떻게 그렇지? 나에게 질문하다 보니 요즘의 내 삶이 그렇다는 대답이 나왔다.


지난 주일,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 집순이, 집돌이인 우리 가족을 밖으로 불러냈다. 주말과 주일에 웬만해선 가지 않는 황리단길로 가보자 하고 나섰다. 몇 달 전부터 찜해 둔 중고 책방이 있는 곳이 하필 황리단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길은 복잡하다 못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도착한 책방은 SNS에서 본 것 그대로의 정취와 풍경을 담고 있었다. 얼마나 행복하던지, 주책없이 벙싯거렸다. 쨍하게 맑은 가을 하늘까지 도와주는 듯해 기분이 최고조에 달했다.

책방은 오래된 한옥을 그대로 살린 곳이었다. 지붕을 잇는 기와, 집을 떠받치는 대들보, 세월이 그대로 드러낸 흙벽까지, 운치가 있다 못해 넘쳐흘렀다. 주차하러 간 남편을 뒤로하고 딸과 나는 나지막한 나무 대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사진만 찍는 건 안됩니다. 책 구매 후에 사진 촬영하세요."

잉?! 나무 대문의 문턱을 넘지도 않았는데 마당에 앉은 남자가 우릴 향해 뭐라 했다. 사진이라니? 우리 손엔 그 흔한 휴대전화도 없었던 상황이라 단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얼빠진 바보처럼 입만 뻥긋거리자니 남자가 다시 말했다.

"책 구매하신 후에 사진 찍을 수 있습니다."

미간에 내 천자기 그려졌지만, 밀고 들어갔다.

"책 사러 왔어요." 나도 쌀쌀맞게 답했다.


어쨌든 책을 골랐다. 남자는 책방 주인으로 보였고, 그가 한 말엔 사연이 있겠거니 했다.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 놓은 공간에 사진만 찍으러 온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주인의 행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책방 주인은 우리가 들어섰을 때부터 외국 손님을 접객 중이었다. 마당 한가운데, 햇살이 가득한 곳에서 손님들과 마주 앉아 있었다. 우리 다음에도 여러 명의 손님이 오고 갔지만 우리에게 했던 말은 하지 않는 게 아닌가. 30분 가까이 머무른 동안 그는 같은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기분이 몹시 상했다. 뭐지? 왜 우리한테만 그랬지? 질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책값을 치르며 상한 내 감정을 전하자 결심했다.

"사장님, 아까 저희가 이곳에 들어올 때 사장님께서 '사진만 찍는 건 안됩니다. 책 구매하고 사진 찍으세요.'라고 하셨지요?" 책값을 치르며 건넨 내 말에 사장이 수긍했다.

"저희가 책방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런 말씀을 하셔서 엄청 당황스러웠어요. 어떤 오해를 받는 것 같아 마음도 상했고요. 처음엔 모든 손님에게 하는 말씀이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저희 다음으로 들어오는 분들껜 그런 말씀 없으시더군요. 그래서 마음이 더 상했어요." 조곤조곤 화내지 않고 내 감정을 전했다.

"저는 다음에도 이 책방에 오고 싶어요. 오픈 준비하실 때부터 팔로우해서 지켜본 곳이라 이런 감정으로 떠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풀고, 다음엔 더 기쁜 마음으로 오고 싶어 말씀드려요."

내 이야기를 들은 사장은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내게 했던 말은 책 방을 찾는 모든 손님에게 동일하게 하는 멘트라 했다. 접객 중이던 손님이 오랜 친구인데 몇 년 만에 외국에서 들어온 터라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었단다. 그래서 우리 다음 손님들에겐 경고 아닌 경고를 하지 못했다는 사정을 말했다. 더불어 우리에게 진심으로 사과도 전했다.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고, 첫 방문에 불편하게 한 점을 정중히 사죄했다.

"차분히 설명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간과한 부분이었는데 손님 덕분에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저도 감사드려요. 제 말이 편치 않으셨을 텐데 잘 들어주시고 사과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덕분에 다음에도 찾을 수 있게 됐어요."

책방 주인과 우리 모녀는 서로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나를 다독일 만큼 힘든 상황이 별로 없는 이유는 내 감정을 숨기지 않는 덕분이다. 갈등이 생길 때, 갈등을 만든 상황과 감정이 분리될 때까지 시간을 둔다. 그런 다음 가능한 '내 감정'을 중심으로 말한다. 상대의 항변도 충분히 듣는다.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면 수긍하고 공감의 한 마디도 전한다.

대부분의 경우 통하는 방법이다. 이게 통하지 않는다면 뭐, 그 사람 인성 문제겠거니 여긴다.

"아, 당신 생각은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하고 돌아선다. 두 번 보지 않으려 최선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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