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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벌띵 Oct 28. 2023

너 참 질린다

다들 처음에는 그렇게 말해요. 너 참 재밌다, 웃긴다

그러다가, 실망하는 거죠. 전 언제나 사람들의 기대만큼 밝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아, 너 이런 애였니? 이러고 가버리는 거예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래서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잃고 싶지 않으니까 무리를 하게 돼요.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어서.


그랬더니 이런 사람도 있었어요. 다희 너는 깊이가 없어, 얕아, 그래서 좀 질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일 년 / 최은영, 문학동네



다희의 이야기에 멈추었다. 마음대로 의미 짓고 규정지어 놓고 떠나버리는 사람들, 떠나는 자신이 편하려고 다희에게 '너 참 질린다' 말하는 사람들, 그런 비난을 오롯이 견디며 무리해 좋은 모습을 보이려 애쓰는 다희. 책 위에 박힌 글자가 다희 인양 손으로 더듬어 쓰다듬는 내 눈이 붉었다.

내 첫인상이 어떤지 귀에 딱지가 도록 들었다. 차갑고 도도하고 냉철하고, 결정적으로 똑똑해 보인다나.. 시골 살이를 시작하고 가장 많이 들은 건 "네는 여기 살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왜 이런 시골에 살아?" 그 말의 의미를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확인 후 그 무게에 무너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시선 끝에 선 나는 그들이 말하는 모습과 판이하게 다르다. 차갑고 도도한  껍데기 안에 푸딩 같은 내가 존재한다. 찌르면 찌르는 대로 누르면 누르는 대로 일그러지고 무너지는 내가 있다.

내 어디가 똑똑하고 영민해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한 열패감으로 인한 묵은 상처가 있다. 재수를 할 형편도 안 돼서 선택의 여지없이 전문대학에 진학했다. 어찌나 부끄럽던지 숨어 다니다시피 대학을 다녔다. 이깟 전문대를 장학금도 못 받고 다니는 게 용납되지 않아 돈 몇 푼에 '목매달'을 했다. 그 흔한 소개팅 한 번, 클럽 한 번을 안 갔다. 4년제 대학, 그깟 것에 내 자존감을 갖다 바쳤다.

그런 내가 똑똑해 보이는 이유를 당최 모르겠다. 나불나불 말이 많은 것도 아니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성격도 아닌데 어디서 그런 근거 없는 이미지가 만들어졌을까.



중학교 때였다. 국민학교를 같이 다녔던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나에 대한 헛소문이 퍼져나갔는데, 그건 바로 내가 엄청난 부잣집 외동딸이란 거였다. 요샛말로 '듣보잡' 소문은 온 학교로 퍼져나갔다. 소문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던 몇몇 아이들이 우리 집에 가볼 기회를 노린 줄도 모른 열셋의 나는 "너희 집에 가서 놀아도 돼?"라고 묻는 한 친구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고 말았다.

이튿날 부터 나는 잘 살지도 않는 주제에 부잣집 딸인 척하고 다닌,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았다.

비슷한 일은 성인이 된 후에도 비일비재했다. 지금은 내 남편으로 살고 있는 남자도 어디서 주워들은 소문을 믿고 나를 평가하고 내친 일이 있었다.

"넌 너무 부잣집 딸이라... 내가 사귀기엔 부담스러워." 헛소리를 해댔다. 지금에야 '고오급스럽게 생긴 나의 미모 탓'이라며 농치는 소재거리지만 몹시 오랫동안 나를 괴롭힌 이미지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잠시 알고 지냈던 분이 갑작스럽게 연락을 해왔다. 어느 강의를 통해 알게 된 분인데, 그분이 몸담은 분야에서는 꽤나 알려진 실력자였다. 함께 강의를 들으며 살펴본 내가 본인 마음에 쏙 든다며

같이 일 해보는 건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내가 알기로 그분이 제안한 일은 고학력의 스펙이 필요하고 중요했다. 한참 이야기를 듣다 나는 솔직한 내 상황을 전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나는 전문대 졸업자이고 영어나 여타 스펙은 대학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란 사실을 담담히 설명했다. 놀라는 것도 모자라 어찌나 크게, 대놓고 실망하던지... 대역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몹시 당황한 몇 마디가 이어지고 통화는 종료됐다. 그리고 마지막 그분의 이야기가 잊히지 않는다.

"4년제 나와야 돼요,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4년제 안 나오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지금이라도 학위를 갖춰두세요."

그 후로 단 한 번도 그분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정물처럼 앉아 책 읽고 글만 쓸 것 같은 이미지가 나에게 있다고 한다. 남편이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껄껄 웃었다.

"우리 댄싱 퀸을 뭘로 보고!! 그 사람 우리 집에 와서 이틀만 살라고 해. 당신이 얼마나 장난스럽고 재밌는지 좀 알려주게."

남편의 말처럼 나의 장난기는 장난 아니다. 장난치지 않는 나는 둘 중 하나다. 슬프거나 아프거나.

나를 어렵게 생각했던 사람 중 누군가는 좌중을 웃기는 내게 반전 매력을 느끼고 게 중에 꼬인 사람은 실망한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사람은 나더러 그런다.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이중적이냐고, 정신 차리라고. 그러고선 질렸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나버린다.



다희의 고백에 멈췄던 나는 다시 책장을 넘긴다.

아무렴 어때. 너를 너로 봐주지 않는 사람 때문에 애써 좋은 사람으로 살아내지 마, 다희야. 애쓰지 않아도 너를 질려하지 않고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 그런 사람만 만나도 괜찮아.


먹먹한 다독임을 다희에게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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