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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전 상서

by 에벌띵

날씨가 제법 쌀쌀한 게 가을이 깊었나 봐요, 어머님. 요즘 건강은 어떠셔요? 수술한 다리는 괜찮으신지, 운동은 꾸준히 하시는지도 궁금하네요.

이번 추석은 어떻게 보내셨어요? 저희 가족이 찾아뵙지 않아 허전하셨을 거라 짐작하고 있어요. 손녀도 보고 싶으셨을 텐데... 가을이 깊어지기 전에 한번 찾아뵐게요.

저희는 어머님과 아버님 배려 덕분에 긴 연휴 동안 충분히 쉬면서 서로를 다독이는 시간을 보냈어요. 방송을 통해 보니 외국으로 다른 지역으로 여행 가는 사람들도 많던데, 저희는 조용히 쉬었어요. 그이도 그간 밀린 잠을 자거나 책을 읽으며 여유롭게 보냈고요. 딸아이와 저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지냈더니 6일이란 시간이 3일처럼 지나가버리더군요. 대구를 오가며 느꼈을 피로가 없다 보니 스트레스도 줄어들어 서로 다정했어요. 감사한 마음과 편안함으로 꽉 채운 시간을 보내게 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어머니.

추석 전 주에 아범이 대구로 찾아뵈었잖아요. 그때 제 일정이 너무 분주히 함께 가지 못했어요. 서운하진 않으셨나 마음이 쓰였어요. 새벽녘에 혼자 대구로 향하는 남편도 많이 안쓰러웠고요. 대구 가면 어머님이 해주신 따순 밥을 먹고 오라 등 두드려 보냈어요. 그런데 쫄쫄 굶고 눈이 움푹 들어가 퀭한 얼굴로 돌아왔더라고요. 그 꼴을 마주하고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그날 밤에 엄마한테 가서 밥도 못 얻어먹고 왔느냐 타박을 했어요.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랬어요. 제가 너무 속상해하니 그이가 그러더군요. 아버님과 칠곡 납골당에서 돌아와 보니 그제야 어머님께서 밥 할 테니 먹고 가라 셨다고, 시간이 너무 늦어 그냥 왔다고요. 다음 달이면 오십이 되는 아들이지만, 막내아들 밥이라도 먹여 보내주시지 그러셨어요.

저는 그이가 많이 안 됐어요. 제가 스물두 살, 남편이 스물네 살 때 연애를 시작한 후로 늘 그이가 안쓰러웠어요. 그 마음이 든 데는 많은 이유가 있어요. 그중 가장 가엾은 건 형네가 집에 들어와 사는 바람에 쫓겨나다시피 독립했을 때였어요. 혼자 사는 집에 가보면 흔해 빠진 김치 한 조각이 없는 거예요. 본가에서 멀기나 했어요?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잖아요. 손바닥만 한 냉장고에 물 한 병, 먹다 남은 김밥 덩어리가 고작이었어요. 제가 그때 그랬어요. 자다가 죽으면 아무도 모르겠다고. 그만큼 외롭고 힘들어 보였어요. 그래서요 어머님. 전 남편이 굶고 다니면 그렇게 마음이 아파요. 김치가 없다며, 조금이라도 가져다줄 수 있느냐 하던 스물몇의 그이가 자꾸 생각나서 눈물이 핑 돌아요. 급하게 이것저것 챙겨 들어선 저를 반기던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아요. 금방 끓여 낸 된장찌개에 흰쌀밥을 입천장이 데이는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먹는 게 기가 차서 '그깟 밥도 못하냐' 타박해도 싱글벙글하던 모습이 아프게 남아있어요. 그리니까 어머님, 이제 제 남편 그만 굶기세요. 굶겨 보내지 마세요.


주면 주는 대로 잘 먹는 사람이지만 이번 추석엔 정성 들여 아침저녁으로 잘해 먹였어요. 라면을 끓여줘도 맛있다는 말을 끊이지 않고 하는 사람이라 음식 하는 보람도 있고요. 하루 세끼 밥만 차려줘도 엄지손가락을 온종일 들고 다니는 사람이에요. 남편이 그럴 때면 어머님께 감사하기도 하고 원망스럽게도 해요. 저는 편안하지만, 어머님께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탓인 것 같아 가엾어요.

제가 결혼하고 시부모님과 부모 자식처럼 지내고 싶다 말씀드렸던 거 기억나세요? 그랬더니 어머님께서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내 자식이 될 수 없다'하셨지요? 그때는 그 말씀이 말도 못 하게 서운했어요. 그러셔놓고 어머님 암 수술하실 때, 무릎 수술하실 때, 저를 붙들고 하염없이 우셨잖아요. 그때 알았어요. 어머님이 저를 의지하고 계시단 걸요. 아들, 딸 앞에선 멀쩡하게 너스레도 떠시던 분이 저와 단둘이 남게 되니 아이처럼 우셨잖아요. 그때 저를 향한 어머님 마음을 알았어요. 알고 보면 여리고 순한 분이시란 것도요. 그 마음 이제 보여주실 때도 됐잖아요.

전요, 그이가 엄마가 해 준 음식 맛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이 정말 안 됐어요. 음식 솜씨도 좋으시잖아요. 그러니 다음엔 꼭 챙겨 주세요. 저도 결혼하고 한 번도 못 얻어먹은 어머님 밥, 어머님 살아생전에 한 번은 먹어봐야지 않겠어요? 그래야 훗날 '우리 어머님이 만들어 주셨던 그 음식 참 맛있었는데, 어머님 보고 싶네'라며 저희끼리 어머님을 그리워하죠.


속상하고 서운한 마음을 풀 곳이 없어 주저리주저리 했네요. 어머님께 보낼 자신도 없으면서, 글로라도 풀어봤어요. 혹여 내년 설에도 명절 제사를 지내는 대신 납골당에 가자 하시려거든 꼭 밥 해주세요. 납골당 다녀오는 3시간이면 밥이 아니라 칠첩반상도 차리겠어요. 그러니 꼭 따순 밥 해서 기다려주세요, 어머님. 또 쫄쫄 굶겨 자식들 되돌려 보내신다면, 어머님을 향한 제 마음도 싹 거둬들일 거예요. 아무리 구박당해도 우리 어머님 건강하게, 아프지 않게, 오래도록 저희 효도받으면서 지내게 해 달라 했던 기도도 안 할 거예요. 매번 끊는다, 끝이다 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제 마음을 이용만 하지 마시고요.


어머님께서 얼마나 더 사실지, 저희는 늘 두렵고 걱정이에요. 그나마 있는 엄마도 없을 그이가 가장 걱정돼요. 그러니 건강하게, 저희 마음도 다독여 주시며 오래 함께 살아요, 어머님. 저도 어머님 보내고 후회하는 나날을 보내고 싶지 않아요. 계실 때 더 자주 뵙고 안아드리고 싶어요. 그러니 잘 부탁드릴게요~



2023년 10월 6일

어머님의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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