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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아침은 스벅이지!

by 에벌띵

스타벅스를 좋아한다. 커피 맛에 예민한 내게 그 맛도 중요하지 않을 만큼 그곳만이 가진 분위기는 매력적이다. 특히 이른 아침, 내가 첫 고객은 아닐까 기대하며 매장에 들어서는 때가 행복하다. 곳곳에 베인 커피 향과 직원들의 활기찬 인사가 오감으로 느껴질 때 심장에서부터 시작되는 생동감은 내 존재를 깨닫게 한다.


몇 해 전, 지인 중 한 사람이 명절 아침 시간을 카페에서 보낸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매우 당연한 일상인 양, 자연스러운 그 전언은 내게 충격이었다. 뭐? 명절을 카페에서? 그게 가능해?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더군다나 지인은 나처럼 한 집안의 아내였고, 시가를 지척에 둔 사람이었다.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남편의 부모님을 찾아 안부를 여쭙는 정도는 해야 한다 여긴 내 관점이 얼마나 시시한 것이었는지 알아챈 날이었다.


몰랐던 사실을 깨닫는 것, 각성은 무서운 일이다. 명절 아침을 카페에서 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 당연하게 그 모습을 열망하게 됐다. 명절이면 시가에 '반드시'가야 한다는 당위는 내 열망과 비례해 절망감으로 다가왔다. 그런 마음을 시가에서 우리 집으로 향하던 차 안에서 슬쩍, 남편에게 내비치었다.

"음.... 그럴 수 있으면 좋겠네." 서운해할지 모른다는 예상과 달리 남편은 수월하게 내게 동의했다. 그때부터 호시탐탐, 명절 탈출을 노렸다.


코로나19의 발발은 일상을 뒤흔들었다. 그중 가장 큰 흔들림은 관례를 향한 우리의 의식에 있지 않나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사수하고 지켜야 한다 여겼던 명절과 제사에 대한 관념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전통적 관례보다 우선시 됐고, 바이러스를 향한 두려움이 그걸 그걸 용인하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 우리에게 명절 시댁 방문 면제권이 주어졌다.


자유가 주어지면 기꺼이 가고 말리라던 곳에 갈 수 없었다. 몇 년간 지속된 팬데믹이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바이러스 감염을 감당할 이유가 없었다. 그다음으로는 바로 아래층에 함께 사는 부모님이 걸렸다. 꼬장꼬장한 유교사상으로 키워진 아버지와 그 형제들은 기어이 명절 차례를 지냈다. 제도와 시류를 아무리 호소해도 소 귀에 경 읽기였다. 득시글 모여드는 일가친척들의 차가운 눈총을 뚫고 카페로 나갈 정도의 용기가 없었던 이유로 우린 우리 집이라는 감옥에 갇혀버렸다.


사회적 거리 두기도, 팬데믹도, 바이러스를 향한 공포도 끝났다. 마스크를 벗었고, 일상이 회복되어 누리던 많은 것들이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기쁨은 활기를 불러왔고,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거리를 좁혀갔다. 더불어 명절 면제권도 회수되었다.


명절 아침에 카페에 가서 뜨거운 아메리카노와 샌드위치를 먹을 거라던 내 외침은 무언의 의무감에 사그라졌다. 남편의 폭탄 발언이 있기 전까지는.

"이번 추석은 대구 안 가도 돼."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정에 도달했는지,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순 없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둔 나를 위한 마음, 지난봄에 나를 집어삼킨 시가로 인한 고통스러운 기억, 쉼이 필요한 남편의 지친 몸, 소비적인 갈등을 회피하고픈 열망 등이 혼재한 결정이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남편이 날린 희생타와 더불어 지난여름 모든 제사와 명절을 지내지 않겠다 선포하고 강행한 아버지의 결정이 존재했다. 생전 처음 양가가 동시에 명절 차례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오, 이런!!! 기쁨의 탄식이 쏟아졌다.


추석을 앞둔 며칠 전부터 딸과 나는 몇 시에, 어디로 갈 건지 계획을 세웠다. 사실 세울 것도 없는 계획이었다. 그동안 무수히 상상하고 그려본 그림이었으니 결정만 필요했다. 이른 아침에도 문을 여는 카페라는 조건에 성립되는 곳은 유일했다. 아침 7시 30분에 문을 여는 그곳, 인어 여인이 반겨주는 곳 말이다.


명절 바로 전날 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한두 시나 되어야 잠이 들던 몸이 10시를 넘기자 급격히 고단해졌다. 간절함이 정신을 그런 식으로 지배했다.

새벽 기상이 어렵다고 그렇게 노래했던 나는 6시 알람을 듣고 망설임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럴 일이냐, 실소가 터진 건 카페에 엉덩이를 붙인 후였다. 다정한 남편은 우리를 집에서 가장 가깝지만 분위기 좋은 스타벅스에 데려다주었다. 각자의 음료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생전 처음 이뤄보는 오늘을 기념해 남편이 쏜 아메리카노는 달콤했고, 카페는 유토피아가 되었다.


특별한 건 명절 아침이라는 사실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딸은 자기만의 즐거움을 누리고 남편은 우리의 노후를 위한 공부에 몰두하는 시간. 고작 이걸 누리겠다고 그 난리 블루스를 떨었냐 할지 모르겠지만, 특별한 날에도 일상을 여상하게 보내는 우리가 나는 사랑스럽다. 이 순간을 누리게 해 준 남편과 시어른들 그리고 부모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주어진 기회를 맘껏 누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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