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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 스며드는 한스러움

by 에벌띵



우리네 한을 명확하게 설명할 길이 없다. 그게 뭐냐 묻는 외국 친구들에게 뭐라 말해야 옳을까? 이런저런 예시를 들어본다. 설명하면 할수록 꼬이고 산으로 가는 이야기에 '아 모르겠다. 그런 게 있어. 한국 사람만 아는 건가 봐.' 해버린다.


한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그저 우울해서 그저 화가 나서 그저 서러워서 생기는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억울함, 우울, 화, 설움, 답답함, 절망, 무기력, 무력감, 이 모든 감정이 한 데 뭉쳐 명치에 똬리를 틀고 있는 상태가 아닐까, 경험을 비춰볼 때 그렇다.


일, 이년 쌓여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년간 반복되는 갈등이 존재한다. 내 통제권 밖에 존재하는 갈등이라는 게 결정적이다. 타고난 본성을 누르고 참아내는 과정을 수없이 겪으면 한이 된다.


이 복잡하고 미묘한 것을 어찌 외국인들에게 설명한단 말인가. 불가능하다. 심지어 그저 참아내지 않는 그들은 한을 담고 사는 우리가 답답하다. 그러니 내 좋은 친구는 나에게 "You must be strong. Be strong!"을 강요했다. 난들 그러고 싶지 않겠냐고! 네가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나라 답했다.



한은 생애 한 번은 풀어내야 한다. 몇 마디 말로 다 풀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엄마 가슴에 맺힌 한스러움도 그렇다. 제대로 풀리지 않으니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무한 반복이 일어난다.

"엄마, 아흔여섯 번만 더 들으면 백 번이에요." 같은 이야기를 수없이 듣고 자란 나의 반응은 그랬다.


지난여름, 엄마의 한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사건이 생겼다.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울지도 못하는 모습에 이대로 있다간 엄마가 잘못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밤새 엄마 이야기를 들었다.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내 반응이 그전과 달랐다.

"아이고, 우리 엄마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마는 최선을 다하셨는데 그런 말을 들었으니 억장이 무너졌겠어요, 나라면 진즉 포기했을 텐데 엄마는 그 시간을 견뎌 내셨네요......" 무한한 인정과 수용의 말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아휴~ 이제 속이 좀 시원하다!" 긴 한숨을 내쉬고 가슴을 쓸어내던 엄마 눈에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흘린 눈물과 달리 낯빛은 밝았다.


한두 번에 풀릴 일이 아니란 건 안다. 하지만 당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존재인 딸로부터 받은 인정과 위안은 엉킨 실타래를 풀 실마리가 된다. 엄마의 지혜와 경험이 더해지니 가속도를 낸다.


그날 이후로 나는 엄마의 이야기를 지겨워하지 않는다. 내 아이에게 그랬듯, 엄마의 마음을 읽는다. 오해의 소지가 있거나 풀어낼 무엇이 보이면 내 의견도 말한다.


"네가 어렸을 때 이런 걸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냐. 너한테 못해 준걸 내가 받는구나." 겸연쩍은 얼굴을 한 엄마는 어린 시절 나를 찾는다.

"그땐 다들 먹고살기 바빴잖아요. 엄마 세대가 견뎌준 덕에 우리가 혜택을 누리는 거죠. 그러니 누리세요, 엄마." 여전히 엄마에겐 어린 딸일 나는 엄마 덕에 단단해졌다. 서로의 한을 품고 다독이는 아름다운 모녀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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