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만에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셨다. 암 수술과 회복으로 여윈 몸을 하고 귀가한 아버지를 꼭 안으니 본향에 돌아온 듯 마음이 평안했다.
“집 안 날아가게 잘 붙들고 있었나?” 딸이 눈물바람이라도 할까 농을 던지는 아버지께 희게 웃었다.
오랜만에 온기가 도는 집에 모녀 삼 대가 나란히 앉았다. 짧았지만 힘겨웠던 수술과 병상생활을 어머니가 한탄하듯 쏟아냈다. 자식들이 뻔질나게 들락거렸어도 칠십 노인 둘이서 의지가지 하며 보낸 10일이 얼마나 무섭고 서러웠을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던 중에 엄마는 동생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거 아나? 아빠가 니 전화받을 때만 ‘우야~, 아빠다~’ 하는 거?”
“네? 제가 전화할 때만 그러신다고요?”
“그래, 니 동생들한테는 ‘어, 아빠다’ 하는데 니한테만 ‘우야~ 아빠다~’하고 받거든. 그래서 ‘우야~, 아빠다~’하면 니 전화구나 하고 절로 안다.”
부모님께 나는 첫 자식이다.
스물일곱, 스물넷의 남자와 여자가 처음으로 아빠와 엄마로 불린다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 돌이킬 수 없는 무한 책임의 바다로 스스로 뛰어드는 두려움은 아니었을까.
나흘이었다. 엄마의 산통이 지속된 시간은. 둘 중 하나는 포기하라는 의사를 윽박질러 얻은 천금 같은 딸이었으니 얼마나 귀했을지. 대가족이었던 아버지 집안의 누구도 내가 딸이라고 아쉬운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버지 사랑이 지극한 때문이었는지 나는 남아선호사상의 끝판왕이었다는 할아버지 사랑도 넘치게 받고 자랐다.
사랑이 크면 기대가 크고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나를 사랑한 만큼 부모님의 기대는 끝없이 컸다. 온갖 잡다한 예술적 재능이 넘쳤던 내게 부모님이 꾼 꿈은 사뭇 달랐다. 고집도 어찌나 세었는지, 한 고집하던 아버지에게 맞불을 놓는 통에 엄마의 마음고생이 여간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께 난 늘 1번이었다. 내 앞에 누구도 세우지 않았다. 당신을 꼭 빼다 닮은 외양이며 성격, 재능까지,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테다.
처음 내어 주는 마음, 사랑은 무섭다. 깊이 각인되어 온 생을 지배한다. 나를 처음으로 아빠라고 , 엄마라고 불러 준 아이에 대한 뜨거움을 무엇과 비교할까.
내 딸을 낳고서야 그 열기를 알았고 이해하는 중이다.
부모로 모든 처음을 선사한 아이는 부모를 무장해제 시키나 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오십 된 딸에게 여즉 ‘우야~, 아빠다~’로 답할 수 있나. 둘째에게도 막내에게도 주지 못하는 것을 유일하게 주는 이유다.
위층 살면서 아래층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본다.
이내, “우야~ 아빠다~”한결같은 아버지 목소리다. 안심이 된다. 웃음이 걸린다.
이내 답한다. “아부지~ 드시고 싶은 거 없으셔? 딸내미가 쏠게요!”
껄껄, 웃음이 귓가에 울린다. 실없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