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와 관련된 일을 유독 기억을 못 하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선택적 기억상실증인 건지, 이해되지 않는 그의 반응을 나는 핑계라고 단정했다.
"아니, 어떻게 그 일을 잊어버릴 수 있어? 그 큰일을? 그냥 모르쇠로 넘어가고 싶은 거 아냐?" 자기 엄마를 보호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라 여겼다.
우리가 대학에서 만났을 당시, 남편은 큰 키와 잘생긴 외모, 좋은 머리와 성격까지 소유한 '만찢남'이었다. 공공재로 남겨뒀어야 할 그를 사귄 내가 대역 죄인의 반열에 오른 건 당연한 수순이었을 만큼 그는 인기남이었다.
처음 사귀기로 한 날 그는 내게
"나같이 못난 놈이랑 사귀어도 괜찮겠어? 나를 만나서 네 인생이 망가질까 봐... 나는 그게 걱정돼?" 겸손을 넘어 자기 비하적 발언을 덧붙였다. 뭐지, 이건?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겨우 스물두 살의 나는 하는 말이려니.. 흘려 들었다.
그는 이상하리만큼 자신을 업신여겼다. 누가 봐도 인정할 만한 자기의 장점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모르는 정도를 넘어 확고히 부정했다. 만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인정할 외모를 칭찬하면 질겁하고 고개를 저었다. 얼굴값 할까 걱정했던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것이 그의 진심이었다는 건 결혼 후 시어머니를 가까이 지켜 보고서야 깨달았다.
"당신이 무시당하니까 나도 같은 꼴을 당하는 거 아냐! 지금이라도 당신 자리를 제대로 찾아, 그렇지 않으면 우리 딸까지 당신 꼴을 당하고 클 테니까!!"
시아버지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간 자리에서 시어머니는 내 남편을 향해 온갖 짜증과 화를 내고 퍼부어댔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는, 막무가내의 분노 앞에서 남편은 그저 묵묵히 견디었다. 남편의 눈을 찌를 것 같은 손가락, 침이 튀도록 커지는 고성, 나는 겪어보지 못한 가차 없는 비난의 말을 쏟아내는 여자가 그의 어머니라는 게 낯설고 이상했다.
세 살배기 딸에게 그 모습을, 너무 가엾은 제 아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품에 꼭 안았다. 바들바들, 딸의 떨림과 공포를 느낀 순간, 나는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붙들고 현관 밖으로 몸을 피했다. 닫히는 문틈으로 울음을 겨우 참고 있는 그가 보였다.
비통하고 참담하다, 정치인들이 카메라에 대고 하는 말의 실체를 온몸으로 실감하고 돌아온 집에서 나는 남편에게 자신의 자리를 찾으라 요구했다. 부모가 자식을 상대로 보이는 그 꼴을 더는 참지 않겠다 선포했다.
"당신은 이제 어머니 아들이기 전에 내 남편이고, 내 남편이기 전에 내 딸의 아버지야. 나는 내 딸의 아버지가 그런 꼴을 당하고 사는 걸 용납할 수 없어. 그러니 당신이 못하겠다면 내가 해. 한 번만 더 내가, 내 딸이 보는 앞에 아니, 내 눈에 띄지 않더라도! 당신을 쓰레기통 취급하면 어머니가 아니라 대통령이래도 가만 안 둬. 인생이 어디까지 비참해질 수 있는지 나도 보여줄 거야. 새파랗게 어린, 당신 자식들보다도 어린 나한테 어떤 모멸을 당할 수 있는지 기대하시라 전해."
내 말이 그에게 어떤 도화선이 되었던 건지 아니면 진짜 내가 본인 어머니와 맞설지도 모른다 여긴 건지 남편은 서서히 변했다.
유난히 어머니와 관련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편을 이해한다. 난산으로 태어난 남편을 낳고 시어머니는 죽을 고비를 겪었다 했다. 대구라는 큰 도시에 살고서도 '남자'의사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가정분만을 결정한 어머니 선택을, 본인이 감당해야 마땅했을 고통의 무게를 아들에게 넘겼다. '너를 낳다 죽을 뻔한 엄마'라는 프레임을 남편 목에 단단히 씌워두고 죄책감을 대가로 받아낸 셈이다. 그러니 어린 시절부터 그는 어머니를 묵묵히 견뎌냈고, 낮아지고 무너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망각이란 도구를 선택했다. 어머니가 쏟아붓는 비난과 모멸을 그렇게 견딘 것이다.
"나는 당신 엄마가 아니야."
채워지지 않은 모성을 나에게 바라는 남편에게 나는 냉정하게 말한다. 본인이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받은 딸을 보며 안심하고 기뻐하다가도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는 남편을 정신 차리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간혹 그의 엄마 노릇을 자처한다. 아주 작은 변화도 알아봐 주고, 가족을 위해 하는 그의 헌신에 감사를 표한다. 말하지 않은 필요를 채워주고, 그가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인지 자주 일깨운다. 내 딸을 키운 노하우로 남편 안에 자라지 못한 어린 남자아이를 키워낸다.
"당신이 누구라고? 당신은 하나밖에 없는 내 남편이고 내 딸의 아버지야. 당신이 거지면 우리도 거지고, 당신이 왕이면 우리도 왕이야. 그러니 당신은 왕이어야 해. 내가 당신 뒷배야. 그러니까 어깨 펴고, 주눅 들지 말고, 생긴 값하고 살아!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