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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잘하고 있어

라흐마니노프의 위로

by 에벌띵

지난가을부터 클래식 음악 관련 수업에 참여 중입니다.

클래식 음악과 공연을 좋아하는 데다, 나이가 들수록 음악에 담긴 서사가 더 와닿습니다.

성공한 덕후가 되기엔 추앙하는 대부분의 작곡가가 천국에 계시는 터라 무한 반복되고 재해석되는 후학들의 연주를 쫓아다닙니다. 딸에게 바이올린을 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조용히 고백해 봅니다.


요즘은 라흐마니노프에 흠뻑 빠져지 냅니다.

러시아 태생의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현대를 대표하는 클래식 작곡가인데요, 2022년 임윤찬 피아니스트가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콩쿠르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대한민국이 사랑하는 작곡가가 되지 않았나 합니다.


그의 피아노협주곡도 좋지만 개인적으로 교향곡 2번을 더 사랑합니다. 교향곡 1번의 혹평으로 음악가로서 삶이 무너졌던 라흐마니노프를 다시 세운 곡인 만큼, 곡 전반에 묘한 힘이 있습니다.


특별히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중 3 악장은 치유와 회복을 노래한다 할 만큼 감동스럽습니다. 클덕(클래식덕후)들이라면 모두 고개를 끄덕일 거라 감히 주장해 봅니다.





홈스쿨링을 하는 동안 별다른 갈등이 없던 딸과 최근 소소하지만 무시하기 어려운 과정을 통과 중입니다.

태어나 처음 생긴 남자 친구 때문입니다.


사랑에 빠진 첫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저는 딸 덕분에 매일 복기 중입니다. 대학 때 만나 11년 연애 후 결혼 한 남편과의 서사를 되짚으면서요 그렇게라도 이해해 보려 애씁니다.


홈스쿨링의 특성상 크고 작은 계획과 감정을 딸과 공유했습니다. 엄마라는 이름 안엔 선생, 코치, 상담가, 멘토 등이 함유되었습니다. 힘에 부쳐 모두 내던지고 싶었던 시간과 과정을 다 적자면 벽돌책입니다.


견고하게, 한 땀 한 땀, 장인 정신을 담아 일궈 낸 관계가 '남자 친구'라는 절대 명사 앞에 옹졸해질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좋아하는 남자 사람 친구가 생겼다길래 크게 반대하지 않고, 예쁘게 시귀거라 했습니다. 오만스러웠네요. 제 혀를 뽑아버....



딸은 자신의 변화를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만, 엄마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오직 남자 친구 이야기할 때만 행복해합니다. 다른 주제를 건네면 시큰둥, 짜증, 무관심 중 하나를 시전 합니다. 밥 먹을 땐 어떻고요. 밥 상 앞에 스마트폰 사용 금지 조항을 가뿐하게 어깁니다. 특히 외식할 때 그렇습니다. 혼자 떠들고 혼자 밥 먹는 저를 발견하고 꽤 당황스러웠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그러더군요.

"나야 아침에 나가 밤에 들어오니까 괜찮지만, 당신은 많이 서글프겠어. 홈스쿨링 한대서 당신 커리어를 전부 내려놨는데, 그것도 모르고 남자 친구에 빠져 엄마 말을 무시하니.... 당신 마음이 다칠까 걱정이다."

울 뻔했습니다만, 오기로 참았습니다.




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면 두 연인의 속삭임이 시작됩니다(고딩들에 허락된 유일한 시간입니다). 하루 종일 제 속을 버선 뒤집 듯했던 모습은 간 곳 없이 좋아죽습니다. 내 집 딸이나 남의 집 아들이나, 사랑스러운 동시에 화딱지가 납니다. 걱정과 심술이 솟구칩니다.


결국 라흐마니노프를 듣습니다. 교향곡 2번 3악장을 주야장천 듣습니다.

보이지 않는 피 칠갑을 한 제 마음을 바이올린 선율이 보드랍게 안으면 물기가 동공에 고입니다. 남편 앞에서도 오기로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흘러내립니다.

"수고했어. 정말 애썼어. 괜찮아. 잘했고, 잘하고 있어."

바순이 눈물이 지나간 곳에 바람을 호호 불어줍니다.

그때만큼은 라흐마니노프가 저를 위해 남긴 유산이 됩니다. 치유와 위로를 받습니다.




글을 적는 지금이...... 오후 3시네요.

오늘은 몇 번이나 라흐마니노프와 만나게 될까요

저와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 함께 들으실 분, 계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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