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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푸르시오!!

by 에벌띵

뜨개질을 하는 사람은 백 번 만 번 공감하는 공포의 순간이 있다. 바로 ‘푸르시오’의 공포.

푸르시오란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떠 놓은 편물을 한 두 줄도 아니고 왕창 풀어야 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나의 경우 최소 열 줄 이상 풀어야 할 때다. 한두 줄 푸는 거야 일도 아니다.

그 푸르시오의 순간은 우연히 찾아온다. 아무 생각 없이 뜨던 편물에서 설핏 어색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코의 개수가 맞지 않다던가, 무늬가 멀리서 보면 티도 나지 않을 만큼 틀렸다던가 하는 게 띄는 것이다.


그 어색하고 이질적인 무엇은 사실 뜨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절대 알 수 없다. 완성한 후에 입고, 걸치고 다녀도 아무도 모른다. 뜨개질의 고수라도 남의 편물을 뜯어 살피지 않고서는 눈치채지 못한다. 두 눈 질끈 감고 넘겨도 무방하다.

정작 뜨는 사람의 내적 갈등은 심각하다. 사뭇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고작 그거 하나 틀렸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고, 사용하거나 입는데도 아무런 하자가 없다. 완성 후엔 본인조차 두 눈 부릅뜨고 살펴야 겨우 찾을 테고.


코바늘은 그나마 낫다. 시원하게 풀어낸 후에 한 코만 주우면 그만이다. 뜬 정성은 아까워도.

대바늘은 사뭇 다르다. 실의 굵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겨울 스웨터를 뜨기 위해 걸어야 하는 코만 해도 수백 개에 이른다. 잘 못 뜬 부분까지 풀어낸 후에 그 작은 코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대바늘에 다시 걸어야 하는 고행이 시작된다. 그러니 뜨개 모임에서 ‘저 푸르시오 해야 해요’라는 누군가의 고백은 모두의 탄식을 자아낸다. 말릴 수도 없고, 말릴 재간도 없는 ‘푸르시오’.


그 고행을 감내하며 뜨개인들은 푸르시오를 감행한다. 틀린 무늬 하나, 잘못 센 코 하나가 편물을 볼 때마다 눈에 걸릴 게 자명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모르지만 자신은 아는 실수, 흠, 찝찝함을 지우는 방법은 단 하나다. 실수한 곳까지 풀어 다시 뜨는 것.




세상살이도 그렇다. 대충 눈 감고 넘어가도 될 일도 있다. 긁어 부스럼 만들 일 있냐, 핀잔 어린 충고를 들을 일도 ‘천지삐까리’다. 하지만, 그렇지만, 나는, 자신은 알지 않나. 대충 눈 감고 넘긴 그 일로 평생 이불킥을 해야 하고, 문득문득 떠올라 똥도 편안히 못싸는 불상사를 간혹 겪는다.

그러니 때론 굳이 잘못과 실수를 들춰내어 사과를 하든 용서를 하든 해야 할 일을 만든다. 삶의 여정을 바로 잡는다. 비록 부끄럽고, 힘도 들고, 뭐 하는 짓인가 싶은 허무함이 밀려들지라도, 훗날 똥도 편안히 못싸는 것 보다야 낫지 않은가 하면서 말이다.




오뉴월 땡볕사리에 겨울 스웨터를 뜨고 있다. 원래 그렇다. 지금 쯤 겨울 옷을 시작하지 않으면 제 계절엔 못 입을지도 모른다.

목둘레에서 시작해 몸통으로 떠 내려가는 탑다운 스웨터를 7cm는 족히 떴다. 무념무상 몸통으로 내려갈 일만 남았다 여겼는데 소매 늘림을 하는 부위에서 ‘어라?’가 발견됐다. 푸르시오가 강림했다. 7단을 풀거나 모른 척 넘어가거나.

내 안에 있는 악마인지 천사인지 모를 목소리가 속살거렸다.

“그대로 뜨다간 그 옷 입을 때마다 이 부분이 눈에 띌 텐데 괜찮겠어? 모른 척 넘어갈 수 있겠어? 찜찜하지 않을 자신은 있고?”

젠장, 결국 풀고 말았다.


뜨는 데 한 시간, 푸는 데는 2분. 그래도 풀어야지. 입을 때마다 눈엣 가시처럼 째려볼 바에야 푸는 게 천만번 나은 일일테다.

혹시 풀어야 할 인간사는 없는지, 드르륵드르륵 시원하게 풀리는 실을 느끼며 되돌아본다.



Q. 완성을 앞두고, 20cm도 더 풀어내야 하는 실수는?

그냥 참고 넘긴다. 두고두고 맘에 걸려도 어쩔 수 없다.

인간사도 그렇다. 너무 오래된 건 손 쓸 길이 없다. 뜨개도 인간사도 너무 멀리 가기 전에 간혹 멈춰 살펴야 하는 건 매 한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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