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결은 낯선 복도에 발을 디뎠다. 어깨에 가방을 맨 채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멀어졌다는 감각이 몰려왔다. 새 교실의 공기, 처음 듣는 이름들, 조심스레 건네는 인사. 그는 마치 누군가의 인생 한복판에 조용히 끼어든 손님 같았다.
쉬는 시간, 그는 창가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봤다. 종소리가 울리고 친구들이 삼삼오오 몰려나가는 와중에도, 그는 혼자였다. 손끝은 무의식 중에 책상 모서리를 따라 선을 그었다. 첼로 활처럼, 조용하고 느리게.
미국 외삼촌 댁에 다녀온 동안 모든 게 정리되어 있었다. 학교도, 첼로도, 모든 게.
휴대전화조차 바뀌어 있었다. 친구들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엄마는 은결의 모든 걸 지워버렸다.
SNS 메시지에 남겨진 하연의 마지막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의 삶은 점점 계획된 궤도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엄마는 이제 더 이상 말로 설득하지 않았다. 대신 시간표와 일정표, 학원과 내신 성적, 모의고사 결과가 말 대신 그의 하루를 채웠다.
밤이면 잠들기 전, 불 꺼진 방 안에서 은결은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둘의 비공개 계정은 더 이상 업데이트되지 않았지만, 사진들은 여전히 있었다. 연습실 한편, 맞은편에 마주 앉아 웃던 하연, 그리고 그가 활을 들어 올리며 찍힌 순간.
그 사진을 넘기다가, 문득 은결은 그때 하연이 어떤 눈빛이었는지 떠올렸다. 조용히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뒤엔 단단함이 있었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 그래서 더 눈이 갔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하연은 달랐다. 그의 엄마처럼 무언가를 강요하지도 않았고, 친구들처럼 쉽게 기대지도 않았다. 대신, 그녀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연주를 이어갔다. 감정을 말로 드러내기보다, 선율로 전하던 사람. 그런 그녀의 중심에, 자신이 상처를 남긴 건 아닐까. 은결은 자꾸 그 생각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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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연 역시 은결이 없는 시간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연습실은 여전히 같았고, 악보는 계속 넘어갔다. 하지만 빈자리는 자주 시야를 가로막았다.
예진은 종종 물었다. "은결이 소식 들은 거 있어?"
하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잘 지내겠지."
텅 빈 연습실에 홀로 있을 때면 하연은 은결이 앉았던 자리를 한참 바라보곤 했다. 악보를 넘기며 문득문득 떠오르는 프레이즈, 그리고 그 위에 자연스레 덧붙여지는 첼로의 기억.
연주회가 끝나고 하연은 자작곡을 쓰기 시작했다. 악보에 선을 긋고 멜로디를 얹으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와의 시간을 하나씩 꺼내어 덧입히고 있었다.
다른 장소, 다른 시간 속에서 여전히 같은 감정을 지닌 둘은 따로 또 같이 일상을 이어갔다. 견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