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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자리, 비워진 선율

by 에벌띵

며칠 동안 은결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연습실에서도 만날 수 없었다. 마치 그곳에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하연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직감했다. 손끝이 떨리고,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조심스럽게 스치던 손길, 곧게 뻗어오던 눈빛, 그 모든 것들이 꿈인양 아득했다.


갑자기 떠오른 듯 하연은 폰을 열어 둘만의 대화창에 메시지를 남겼다.


- 은결아, 어디야?

오늘 같이 편곡 마무리하자 했잖아.

너 없이 이 곡 완성 못 해.

나... 네가 있어야 해.


은결의 답은 없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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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이 전학 갔대!!"

교무실에 갔던 예진이 헐레벌떡 달려와 전한 말은 충격이었다.

하연은 대답 대신 멍하니 예진을 바라봤다. 긴 한숨을 몰아쉰 예진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은결이 어머니가 학교에 와서 은결이 담임 선생님이랑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 음악 말고, 공부에만 집중하게 하겠다고. 전학 수속은 벌써 다 끝났나 봐. 당분간 미국 외삼촌 집에 보낼 거라더라.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은결인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았던 거야?"

하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진이 뭐라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첼로가 유일한 탈출구였다던 은결이었다. 그런 은결이 모든 걸 포기하고 사라져 버린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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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주 리허설이 있던 날 무대 뒤 대기실.
하연은 혼자 악보를 들여다봤다.
은결과 함께 맞췄던 곡. 바이올린과 첼로의 선율이 얽히고 흩어지던 마디마디, 둘이 나눴던 호흡..

펼친 악보를 보던 하연의 눈에 눈물이 차 올랐지만. 혼자서라도 해내야 했다. 은결을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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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 조명이 켜지고 하연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활을 들었다.

첫 음이 울릴 때, 은결의 첼로가 없이도 괜찮다고 느끼고 싶은 마음과, 여전히 그의 리듬에 맞춰 연주하고 싶은 마음이 겹쳐졌다.
하지만 하연은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만의 템포로 곡을 밀고 나갔다.

음표 하나하나에 스쳤던 마음들이 맺혔다 흘렀다.
마지막 음이 공중에 뿌려질 때까지 하연은 쉼 없이 활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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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뒤 대기실에서 하연은 말없이 바이올린을 하염없이 닦았다. 언젠가의 은결이 그랬 듯이.
여러 번 숨을 들이켜고 내쉬었다.

함께 준비했던 곡을 은결 없이 채웠다.
공허했고, 아팠다.
그건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아픔이었다.
누군가의 빈자리를 참아내는 것,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마주하게 될 날을 기다리는 것.

그건 이별이 아니라,
더 단단해지는 시간의 이름이었다.
이건 끝이 아니었다.
그저, 다시 닿기 위한 준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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