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umpkin Jun 15. 2020

절절한 사랑의 고백,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고

밟아라.. 나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부터 빠른 템포로 숨 가쁘게 이어지는 스토리 전개는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예수회의 신부로 신학적 재능이 뛰어나고 신자와 사제들에게 존경을 한 몸에 받던 페레이라 신부가 ‘구멍 매달기’라는 고문에 못 이겨 배교를 했다는 보고가 교황청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사건은 시작된다. 


하느님의 사랑에 확신에 가득 찼던 인자한 성품의 페레이라 신부. 스승 신부님의 배교를 믿을 수 없던 제자 가르페 신부와 로드리고 신부는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하고 오겠다는 목적으로 일본 선교를 자청하여 들어간다.  

시기적으로 워낙 위험하였으나 젊은 신부들의 확고한 신념과 굳건한 믿음 아래 결국 그들의 일본 선교에 대한 허락이 떨어지면서 일본 선교에 나선 로드리고 신부의 보고서를 시작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로드리고 신부는 ‘기치지로’라는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일본 열도로 무사히 잠입하게 되고, 그곳에서 그는 일본에서의 보고 느끼는 자신의 상황과 일본 신자들에 대한 상황에 대한 자세한 보고서를 교황청에 올린다.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이어진 보고서라 나는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소설’이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만약 책날개에 붙어있는, 엔도 슈사쿠가 소설가라는 그에 대한 소개말을 읽지 않았다면, 아마도 마지막 에필로그를 읽을 때까지 보고서인 줄 알고 읽었을 터였다.

 

‘침묵’을 읽기 시작하며 나를 치고 들어온 감정은 하느님을 향한 절절한 사랑에 대한 고통이었다. 그분들은 기도는커녕 성호도 제대로 그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절절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리워했는데, 정작 박해도 받지 않으며 마음껏 ‘당신을 사랑한다’고 세상에 외칠 수 있는 이 평화로운 세상에 태어난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부끄러운 죄책감에서 오는 아픔이 가슴 깊은 한편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책에 나오는 여러 등장인물들 중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인물은 바로 일본인 기치지로다. 한없이 교활하고, 때마다 배신하고 배교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 부지를 위해 로드리고 신부까지 신고하면서도 끝까지 신부 곁을 떠나지 못하고 고해성사를 해달라며 울부짖는 인물. 


그에게 ‘신뢰’란 단어는 사전에 없는 듯, 제 몸 하나 살리고자 배신행위를 우습게 하는 비굴한 자의 표본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그는 끝까지 신부 곁에서 맴돌며 그를 챙겨도 주고, 자신도 카톨릭 신자라고 잡아가라고 외쳐된다. 그러나 고문이 다가올라치면 두 번 생각 안 하고 성화를 밟고 배교하고 풀려나고, 그리고는 또 신부를 찾아와 고해성사를 구하는 거머리 같다 못해 구더기처럼 느껴지는 인물이다. 


로드리고 신부와 기치지로


읽으면서 더러운 구더기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했으나, '과연 나는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면 그와 같은 혹독한 상황 속에 과연 나는 나의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기치지로처럼 그때마다 기회주의자로 내 한 목숨 연명하고자 했을까. "신앙을 지켰을 겁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자신이 없다.


기치지로 역시 지금처럼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밝고 활발하고 환영받는 신자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한탄대로 그는 약하게 태어났고 그것이 그의 십자가이며 그래서 늘 배교한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그의 양심은 고통과 상처로 가득하고. 늘 괴로움 속에 로드리고 신부의 주위를 맴돌며 자신의 비겁한 나약함에 고해성사를 구한다. 

 

처음엔 기치지로라는 인물을 보며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싶었지만, 점점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기치지로에게서 내 모습이 보였다. 내가 필요할 때는 "하느님 사랑해요 도와주세요" 절절한 외침으로 찾지만 조금 편해지면 나는 마치 하느님이 누구신지 모른다는 듯 그렇게 내 삶 속에 푹 빠져 지내곤 한다. 물리적으로 성화를 밟는 배교는 아니나, 얼마나 많은 순간 죄의식도 느끼지 못하면서 그렇게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갔는가. 읽는 내내 기치지로가 그리도 눈엣 가시가 되었던 것은 바로 그에게서 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밟아라.. 나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우리보다 우리의 고통을 더 아파하시는 하느님을 느끼며 눈물이 흘렀다. 피눈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그렇게 짓밟음으로써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상기시켜드려야 했을까. 신자들의 고통을 바라보며 “밟으세요. 밟아도 좋아요”라고 외치는 로드리고 신부의 신자들에 대한 사랑. 예수님 마음이 이러셨겠지.

예수님이 만약 당신 때문에 누군가가 죽어간다면 어떡하셨을까? 
과연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한 신앙인가?
정말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매 순간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잘 이겨낸 로드리고 신부지만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신자들을 보며 갈등을 일으킨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 아닌, 신자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로드리고 신부의 고뇌를 보며 나 역시 그 고뇌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이셨다면, 당신으로 인해 아무 죄 없이 죽어가는 이 순진한 신자들을 보며 ‘당신의 아버지인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위해 순교하시고 천국 가십시오.’라고 말씀하셨을까. '차라리 나를 밟고 지나가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나는 너희를 위해 이 세상에 죽으러 왔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주여, 지금이야말로 당신은 침묵을 깨 버리셔야 합니다.
더 이상 침묵하고 계셔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올바름이며 선이며 사랑의 존재임을 증명하고.
당신이 엄연히 존재함을 이 지상과 인간들에게 나타내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말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침묵하는 예수님을 흔들어대며 로드리고의 신부의 절규가 나의 절규가 되어 가슴에 소낙비 되어 내린다. 갑갑했다. 하느님은 왜 침묵만 하고 계시는 걸까. 왜 한 말씀 주시지 않는 것일까.  


“성직자들은 이 모독의 행위를 격렬하게 질책할 테지만, 나는 그들을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내가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 오늘까지의 모든 시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나라에서 아직도 최후의 가톨릭 신부이다. 그리고 그분은 결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비록 그분이 침묵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오늘까지의 인생은 그분과 함께 있었다. 그분의 말씀을, 그분의 행위를 따르며 배우며 그리고 말하고 있었다.” 


로드리고 신부의 고백이 내 가슴에 메아리 되어 남는다. 신부님의 결정이 옳으셨다고, 하느님께서는 아신다고,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을 거라고, 우리는 당신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내가 그분 옆에 있었다면 등을 도닥거리며 신부님의 손을 꼬옥 잡아드리고 싶었다.


겉으로 드러난 ‘배교’라는 그림은 비슷했을지 모르나, 로드리고 신부가 선택한 사랑의 실천은 옳은 선택이었다고, 하느님만은 로드리고 신부의 당신을 향한 절절한 사랑을, 당신의 자녀들인 신자들을 사랑하는 그 진실된 사랑을 아실 거라고 위로해 드리고 싶다.


 

엔도 슈사쿠


'종교소설과 세속 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20세기 문학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과장된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던, 잠시도 손에서 떼어낼 수 없이 한 호흡으로 읽어 내린 책이었다. 모든 순간이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클라이맥스의 연속으로 숨을 죽이며 읽었다. 엔도 슈사쿠의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 구성은 책을 '읽는다'는 느낌이 아닌, 마치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다. 


이 책의 중심인물인 로드리고 신부는 엔도 슈사쿠에 의해 완전 허구에서 지어진 인물이 아닌 실지로 페레이라 신부를 찾아 나서는 이탈리아 신부인 조세페 켈러 신부를 모델로 삼았다는 사실이 책을 덮고 난 내 가슴을 더 먹먹하게 했다. 


사실, 책을 덮기까지 침묵하는 하느님에 대한 의문이 깔끔히 가시질 않았다. 그런 나를 이해시켜 주신 것은 바로 존경하는 하임 언니의 말씀이다.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던 로드리고 신부와 페레이라 신부.
그들이 깨달은 건, 침묵하는 하느님이 아닌
고통의 현장에 함께 고통받고 함께 괴로워하는 하느님이었어


그랬다. 어쩌면 나는 유다가 바랬던 혁명가 예수님의 모습을 하느님께 요구했는지도 모른다. 내 신앙의 현주소다.  나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을 필요도 없고, 기도도 몰래 올리지 않아도 된다. 성화를 밟지 않아도 되고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하고 성호를 당당하게 그으며 당신에 대한 사랑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다. 


그렇게 선조들이 처절한 피로 지켜낸 신앙의 축복을 내가 누리고 있음에도 감사함을 모르는 나의 흐트러진 신앙이 몹시도 부끄럽게 느껴지게 시간이었다. 


나는 하느님에게 섭섭한 딸일지는 모르나, 하느님은 내게 늘 '감동시키시는 하느님'으로 느껴진다.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감동시키시는 하느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서 사랑의 시선을 거두시지 않는 하느님. 그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하느님'. 하느님은 내게 그런 분이시다. 어쩜, 그래서 내가 이리 배짱을 부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는 분이심을 알기에.






엔도 슈사쿠는 일본의 대표적 현대 소설가로 1922년 도쿄에서 출생하였고, 가톨릭 신자인 이모의 영향으로 어머니가 그리스도인이 된 뒤, 엔도도 어머니와 이모의 권유로 열한 살 때 세례를 받았다. 그는 1949년 게이오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장학금으로 프랑스 리옹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으며,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는 종교소설과 세속 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20세기 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1996년 사망했다.

그의 대표작 <침묵>은 그에게 다니자키 상을 안겨 준 작품으로 오랫동안 신학적 주제가 되어 온 “하느님은 고통의 순간에 어디 계시는가?”라는 문제를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상황을 토대로 진지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그려냈으며 신앙을 부인해야만 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고민하는 인물들에 대한 심리묘사가 치밀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위대한 몰락’.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 ’ 여자의 일생’. ‘지금은 사랑할 때’ 등이 있다.






2010. 3. 23

매거진의 이전글 월터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를 읽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