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각자에게 실현해야 할 신화가 있다. 타인이 우리를 믿어주든 말든..
Paulo Coelho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지만, 사실 브라질에서는 소위 ‘엘리트’ 그룹이라 칭해지는 지식층 사이에서는 ‘통속 작가’라 불리며 살짝 외면당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파울로 코엘료는 삶의 많은 경험과 여행 속에 우러나오는 진솔한 이야기들로 읽는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출판되는 책마다 성공을 거둔다. 흐트러진 머리에 안경을 쓰고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 어려운 글들을 쓰며 심각한 자뻑 모드에 빠져있는 그들에게 이만저만 배 아플 일이 아닐 것이다. 그가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이 가진 감정중 가장 뒷맛이 씁쓸한 ‘시샘’ 바로 그것일 게다. 물론, 추구하는 작품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음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
파울로 코엘료는 1947년 8월 24일 브라질의 히오 데 자네이루에서 태어났다. 작가로서 활동하기 전에 그는 연극배우였고, 감독였으며, 작곡가였고, 또한 편집장이었다. 그리고 히피였다.
그는 브라질의 유명한 가수 엘리스 헤지나 그리고 히타 리(브라질의 유명한 여성로커)의 노랫말을 썼으며, 하울 세이샤스와 함께 작업한 ‘Eu nasci há dez mil anos atrás (나는 만 년 전에 태어났어요)’ ‘지따’,’알 카포네’등은 브라질 록의 전설적인 곡으로 남아있다.
후에, 그는 영성 분야에 매료된다. 그것은 그가 히피 생활을 하며 전 세계를 여행하게 하는 모티브가 되고, 또한 비밀 조직사회와 동양의 종교에 관해 실질적인 경험을 하게 하는 배경이 된다.
1982년에 그는 그의 처녀작인 <Arquivo Inferno (지옥의 파일)>을 썼으나 그것은 성공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1986년에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썼으며, 그 경험은 <O Diário de Mago ('마법사의 일기', 한국에서는 '순례자’로 번역되었다)>에 잘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그다음 해 ‘연금술사’를 쓰게 되고, 그 책은 브라질에서 가장 많이 읽힌 책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 외 <As Valkirias(발키 리아스)> (1992), <O Manual do Guerreiro de Luz(빛의 전사의 지침서)> (1997), <Veronicka Decide Morrer(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1998), onze Minutos(11 분)> (2003), O zahir(자히르)> (2005) 등등 많은 책들을 썼다.
파울로 코엘료는 2003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책이 번역된 작가로 뽑히고, 그와 함께 연금술사는 20세기의 문학사상 가장 중요한 현상을 가져다준 책으로 뽑힌다. 74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지금 현재까지 325백만 부가 팔린 것으로 집계된다. 2008년도에는 가장 많은 언어 (67개 국어)로 번역된 책으로 기네스 북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겐자부로 오에와 세계적인 팝 싱어 마도나로부터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다.
그는 글을 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는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을 돕기 위해 도움 기관을 세워 후원을 하고 있다.
‘세상의 고통’과 ‘자신의 가짐’을 분리하지 않고 끌어안는 파울로의 모습은 ‘깨어있는 삶’이 무엇인지, ‘신화를 이루는 삶’이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주고 있다.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작가다.
파울로 코엘료의 글은 참 풍요롭고 넉넉하고 여유롭다. 직관적 성향이 두드러지는 작가가 갖는 타고난 강점일 것이다. 작가의 열린 사고는 읽는 나로 하여금 편안함을 안겨주었고 그를 신뢰하게 했다. 그와 더불어 자연스러움 가운데 삶에 대한 귀한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세계 각국을 돌며 만나지는 사람들 이야기, 그들의 전설 속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는 꼬마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알사탕처럼 깨달음이 하나씩 담겨있었다. 놀랍게도 마치 지금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갈등 속에 있는지를 꿰뚫어 아는 것처럼 그때그때마다 내게 툭 던져지는 한 마디 한마디는 내게는 울림이었고 외침이었다. 그래서 자꾸만 흐느끼게 했다. 먹먹함 속에 자꾸 책을 놓아야 했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게 했다.
누구나 나만의 신화를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왔고 파울로 코엘료는 자신은 이 땅에 보내어진 신화를 이루었다고 했다. 그의 당당함에 초라해진 나의 가슴은 방망이질을 쳐댔다. 나만 힘들다고 자꾸만 어두운 곳만을 바라보는 나를 발견하고는 가슴에 싸한 아픔이 느껴지며 부끄러워졌던 게다. 나 혼자 자꾸만 바닥을 긁고 있는 듯한 느낌에 점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겉으로 보면 모든 것이 평온한 그림인데 왜 나는 그리도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걸까.
파울로가 글 속에서 내게 계속 외쳐대고 있는 것 같았다. 용기를 내라고. 나는 지금 손 까딱 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비겁하게 겁만 내고 있다고. 그의 많은 글 속에 내게 달려들며 나를 온통 뒤흔들어댄 것은 바로 ‘용기’라는 단어였다.
길을 갈 용기가 있는 자에게만 열리는 길
결국, 길을 갈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은 길을 선택할 기회조차도 주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가 책 처음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내내 외쳐대던 ’ 용기’라는 단어가 내 안에 심어지는 순간이었다. 변명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삶이 원할 때 어디 뒀는지 찾다가 지쳐버리는 내가 아닌 지혜롭게 상황 속에 대처하며 내 별을 찾아가는 나이고 싶다는 바람이 뜨거운 용암처럼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었던 책, <흐르는 강물처럼>. 요즘의 나에게 너무나도 필요했던 삶의 지혜와 깨달음이 온전히 책 안에 들어있었다. 언제나 내가 필요한 순간에 삶의 스승이 되어 다가오는 책. 책을 사랑하는 이유다.
분명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르다. 그렇듯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는 다른, 좀 더 새롭고 신선한 부활 속의 나로 만나고 싶다.
어제의 나는 살짝 옆으로 내어두고 새로운 나를 맞는 나 자신. 내게 주어진 소명, 사명, 신화,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이제야 알겠다. 그렇게 살기 위해 나의 삶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는 나의 숙제지만, 어떤 삶을 살고 싶었는지 조차도 몰랐던 어제와는 분명히 다른 나다. 그래서 감사한 오늘이다.
우리 각자에게 실현해야 할 신화가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타인이 우리를 믿어주든 말든, 비판하거나 무시하거나 봐주거나 상관없이, 우리는 그것을 수행한다. 그것이 이 땅에 태어난 우리의 소명이고, 모든 기쁨의 원천이므로.
나도 긴 삶의 여정을 멋지게 끝내고 나의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다. 나에겐 실현해야 할 나만의 신화가 있음이 나를 떨리게 한다. 살아가면서 많은 순간 넘어지겠지만 또 일어날 것이고, 나는 다시 시작하기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내가 이 세상에 온 소명을 다하며 나의 신화를 이루고 싶다. 파울로 코엘료처럼.
2009년 3월 15일에 쓴 리뷰를 오늘 정리하면서 많은 가지치기를 했다. 그 쳐냄을 당한 가지들은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감당하기에 벅찬 감정들로 가득한 표현들이었다. 유치하게까지 느껴지는 느낌들.
그 느낌들은 비록 가지치기를 당했지만, '사십 대 중반의 나이에 나는 그렇게도 절절하게도 나의 신화를 찾아 헤맸구나' 느껴져 살포시 미소가 지어졌다.
그 후로 1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당시, 나의 신화를 이루겠다고 두 주먹 불끈 쥐고 임했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신화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다. 삶의 회오리에 휘둘러지는 게 어디 나뿐이던가.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이어지는 삶의 홍역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런데 오늘 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처럼> 리뷰를 정리하면서 그때 그렇게 열정적으로 임했던 그때 당시의 내가 떠올라 미소가 그려졌던 게다.
고통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묻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는 것뿐이다. 고통과 위기가 닥치면, 우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감정을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대해서도 안 되고, 매사 자책하던 것처럼 벌을 받는 거라고 여겨서도 안 된다. (P263)
흐르는 강물처럼 삶을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웃을 수 있는 일을 찾고 즐거움을 느끼는 일을 하는 것. 그렇게 즐기면서 웃으면서 삶의 장벽을 넘어가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운 삶의 지혜고 깨달음이다.
브런치에 리뷰를 정리하여 올리면서, 지난 느낌들을 바라보는 것은 의미 있는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작가님들과 함께 느낌을 나누는 시간은 내게 참 많은 행복을 느끼게 해 주었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이런 덩어리 시간을 가질 수 없었고 차일피일 미루던 리뷰 정리는 여전히 밀림을 당하고 있을 터, 코로나에게 감사해야 하나?
삶은 항상 나쁜 것도 없고, 항상 좋은 것도 없다. 그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나는 행복해지기도 하고 고통스러워지기도 하고. 하지만 매 번 그렇게 우아하고 지혜롭게 대처되는 것 또한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 속에 빠지게 되고, 또 깨닫게 되고. 그러면서 성장하는 우리.
오늘, 유난히 감사하게 느껴지는 하루다.
2009. 3.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