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선물, 페스티벌

William Burdett-Coutts

by 엔젤라권

2018년 8월 어셈블리 갈라 공연은 만석이었다.


축제의 공식일정은 8월 첫째 주 금요일부터 마지막 주 월요일 까지지만, 어셈블리는 축제 시작일 이틀 전에 프리뷰 공연을 시작한다. 매년 가장 기다려지는 이벤트인 어셈블리 갈라 라운치Assembly Gala Launch는 8월 첫째 주 수요일 저녁 8시에 정확히 올라간다. 어셈블리가 선정한 220여 개의 공연 중 12개 정도의 하이라이트를 선보이는 이 무대는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공식적인 오프닝 파티와도 같다.


에든버러의 랜드마크인 어셈블리홀Assemblyhall(국회의사당)에서 열리는 이 갈라 공연은 지난 2년 연속 아일랜드의 유명 코미디언 제이슨 번Jason Byrne이 진행을 맡았다. 대본 없이 현장의 상황에 맞게 관객을 이끌며 웃음을 만들어내는 특유의 익살은 한 공연의 하이라이트 무대가 끝나고 다음 공연을 준비하는 시간 동안 관객의 마음을 완전히 열어놓았다.

제이슨의 악의 없는 유치한 말장난은 늘 나를 무장해제시켰고, 다음 해 사회자가 바뀌었을 때 나의 서운함은 옹졸하고 지극히 주관적인 비판으로 바뀌었다. ‘제이슨이었으면 이렇게 안 했을 텐데… 뭔가 매끄럽지 않아…’


화려한 오프닝 음악공연과 좌중을 압도하는 아름다운 아트서커스 공연이 끝나자, 제이슨은 장난기 가득한 멘트로 ‘마치 대관식에서 왕을 소개하듯’ 한껏 과장되게 윌리엄William Burdett-Coutts을 무대로 불러냈다.

40년 가까운 세월을 프린지와 함께 한 산증인이자 어셈블리의 극장장인 윌리엄은 올해도 6~7장의 A4용지를 팔랑이며 무대 중앙으로 걸어왔다.


매년 똑같은 패턴이다.

윌리엄은 예쁘게 정리한 큐카드를 들고 오는 법이 없다. 저녁시간 내내 들고 있었던 듯 구김이 있는 A4용지 여러 장을 펼쳐진 상태 그대로 들고 나와서 특유의 빠른 말투로 읽어나간다.


“나는 이 축제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이벤트라 생각한다. 이 도시는 영감 그 자체다.

I think this is the most extraordinary event in the world. City itself is nothing but inspiring...”


언제나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가는 윌리엄의 문체는 사람들 귀에 친한 친구의 이야기처럼 편안하게 들려온다. 축제도시에 보내는 찬사와 감사에 이어, 그는 어셈블리 라인업에 대해 소개하고, 장르별 주목해야 할 공연과 몇 년 만에 돌아온 반가운 프로덕션의 신작을 소개한다.


객석에 앉아 있는 기자들은 어셈블리에서 배포하는 보도자료에 이미 첨부된 내용일 수도 있는 윌리엄의 설명을 중간중간받아 적는다.


윌리엄은 가끔 사회적 이슈에 대한 언급을 하기도 한다.


“좀 전에 누군가 브렉시트에 대해 물어왔다… 우리는 이 나라에 전 세계 사람들이 오기를 독려하며, 이 문화로 가득한 세계에서 서로의 관심을 나눈다. 우리는 명확히 당신이 이 축제에 오기를 원한다.

Somebody asked about the Brexit earlier... we encourage and bring international people to come into this country and share our interests in this cultural world. We certainly Do want you at this festival.”


객석에 있는 모두는 큰 박수와 응원의 목소리로 동의와 지지의 뜻을 밝힌다.


오프닝 갈라는 다른 공연에 비해 이동이 매우 자유롭다.

공연장 통로를 가득 메운 언론사의 촬영장비와 카메라를 비롯해 천여 명의 관객들은 하이라이트 공연의 중간중간에 들락날락을 반복하지만, 윌리엄이 스피치하는 10여분동안은 모두 자리를 지킨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때론 공감하고 때론 감사의 뜻을 표하며 끈끈한 쌍방향 대화처럼 인사말이 이어진다.


“정말 너무 많은 공연들이 있지만… 나는 우리의 제4회 코리안 시즌을 환영한다는 말을 반드시 해야 한다. 이를 위한 엔젤라 권의 노고에 감사한다. There are far too many shows... However, I have to welcome back our 4th Korean Season, Thanks to Angella Kwon for all her hard work on this.”


윌리엄은 잊지 않고 매년 ‘코리안 시즌’에 대해 언급한다.

내 이름이 불리자 객석에 있던 몇몇 친구들이 박수를 치며 호응했고, 나는 의자 깊숙이 몸을 숨겼다.

그의 공식 인사는 어셈블리에서 일하는 스텝들에 대한 감사로 마무리되었다.




1999년 8월 첫째 주 일요일, 마크와 나는 그날의 공연을 마치고 어셈블리 룸즈의 레인바에서 기네스Guinness를 마시고 있었다.

에든버러에 와서 처음 경험한 흑맥주는 한약처럼 쓰게만 느껴지던 초급단계를 지나자, 부드러운 크림거품과 씁쓸한 맛에 점점 길들여져 갔다. 정신없이 지나간 축제의 첫 주말을 보내고 마시는 기네스는 달콤했다.


우리가 공연하고 있던 어셈블리 룸즈의 볼룸은 축제기간에만 공연장으로 사용하다 보니 기술적인 제약이 많았다. ‘공연장이 아닌 공연장’에서의 셋업과 리허설, 그리고 모든 것이 첫 경험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턴어라운드는 ‘카오스Chaos’ 그 자체였다. (*턴어라운드 Turn-around : 끝난 공연의 세트와 소품을 스토리지로 옮기고, 다음 공연의 셋업을 진행하는 시간.)

덕분에 우리는 시차적응이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현지의 시간에 녹아들어 갔다

두 잔의 기네스를 비워갈 때쯤, 위스키 잔을 든 윌리엄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마크는 ‘서로 알지?’라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짧게 소개를 이어갔다.


“엔지, 여기는 윌리엄이야. 윌리엄, 이쪽은 쿠킨(난타)공연의 엔젤라야.

Angie, This is William. William, This is Angella from Cookin'.”


신뢰 가는 진중한 얼굴에 딱 ‘영국 신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윌리엄과는 이미 공연장에서 두세 차례 마주쳤지만,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이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오랜 친구처럼 반갑게 비쥬를 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공연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갔다.


“엔젤라, 너희 공연은 엄청난 성공을 거둘 거야. 정말 좋았어!

Angella, Your show is gonna be huge. I loved it!”


당시(1999년)에 이미 20여 년의 시간을 프린지에서 보낸 윌리엄이지만, 난타는 그가 처음 본 한국 공연이었다. 그는 작품에 대한 기대와 흥분을 감추지 않았고, 올해 가장 이슈가 될 공연이며 자신이 아는 언론과 친구들에게 ‘꼭 봐야 될 공연Must-See’으로 추천하고 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어, 나에게 첫 프린지의 감회가 어떤지, 에든버러에서 생활하는 데에 불편한 건 없는지 등 질문을 이어갔다.


“문제가 있으면 마크에게 얘기해, 그가 다 해결해 줄 거야.

If you have any problem, talk to Mark. He will fix it.”


라고 말하고는 자신이 한 말에 만족한 듯 마크를 보며 웃었다.

난타는 그가 본 첫 한국 공연이었고, 나는 그의 첫 한국 친구가 되었다.





2013년 8월,

윌리엄과 나는 프레데릭 스트리트Frederick St.에 있는 프랑스 레스토랑 카페 루즈The Café Rouge에서 브런치를 먹고 있었다.

Cafe Rouge, Edinburgh


우리의 대화는 매년 같은 패턴으로 이어진다. 전년도 축제가 끝난 9월부터 다음 해 7월까지 각자 뭘 했는지 대략적인 근황을 묻고 답한다. 이어서, 그 해 선정된 공연에 대한 의견과 ‘꼭 봐야 할 공연 Must-See’ 리스트를 공유하고, ‘올해는 누가 언제 온다고 했고, 누구는 안타깝게도 못 올 것 같다’는 친구들의 에든버러 방문 일정에 대한 정보를 나눈다.


하지만 이날은 평소와 다른 대화가 이어졌다.

2010년 8월의 윌리엄은 ‘서울에서 공연장을 운영하겠다’는 나를 말리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그로부터 3년 후, 그는 같은 자리에서 ‘See, I told you… 거 봐, 내가 뭐랬어…’로 시작하는 훈계와 힘들었을 친구를 달래는 위로의 말을 늘어놓게 되었다.


윌리엄은 런던의 리버사이드 스튜디오Riverside Studios공연장을 1993년부터 운영해 온 극장장 선배(?)였다. 서울에 전용관을 오픈하기 전, 나는 인생 선배이자 극장장 선배인 윌리엄에게 공연장 운영 관련 고민되는 몇 가지를 상의하고 있었다. 우리말로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릴’ 기세로 윌리엄은 나에게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다.


“공연장이라는 게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가 나오기 힘들어. ‘어떤 공연장이다’하는 네임밸류를 쌓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리고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어떤 날은 예상치도 않은 화장실 관련 컴플레인까지 듣게 된다구. 매입매출을 맞추고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것도 머리가 아픈데,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공연장의 특성상 민원 거리가 되지 않는 것에서도 민원이 발생하기 일쑤고, 해결해야 하는 일은 매일 산재되어 있어”


그는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부정적인 예를 들었다.

당시에 나는 ‘윌리엄이 나를 참 많이도 걱정해 주는구나…’라고 고맙게 생각하며 기분 좋게 얘기를 듣고 있었을 뿐, 이미 결정한 바를 바꿀 생각이 없었다.


나만의 착각인지 모르지만, 나는 남의 말을 잘 듣는다.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물론, 고집이 좀 세고 이미 결정한 일에 대해서 남들이 말린다고 그만두지는 않았다. 우선 스스로 계획한 바를 진행해 보고, 그 결과를 직접 경험한 이후에 친구들에게 묻는다.

“왜 말리지 않았어?”

그러면 친구들은 진심으로 어이없어하곤 했다. 다들 자신들이 얼마나 말렸었는지 답답한 듯 얘기하지만 내 기억과 많이 다르다. 아마도 친구들은 자신이 반대하는 이유를 침착하게 조근조근 설명했을 것이다. 그건 나에게 ‘하나의 의견’으로 기억될 뿐, 나는 왜 나에게 ‘하지마!’라고 확실하게 얘기하지 않았는지 묻곤 한다. 서로가 하는 얘기는 매번 같아서 결국 끝나지 않는 돌림노래가 되곤 했다.


이 날, 나와 윌리엄도 돌림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하지 말랬잖아…’라고 시작하는 윌리엄과 ‘그냥 이런저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의견을 말한 거잖아’라고 말하는 나의 돌고 돌아도 답 없는 대화.


나는 지난 3년간 수십 번 윌리엄의 말을 곱씹었다.

공연장을 운영하겠다는 나를 말린 건 윌리엄만은 아니었고, ‘말릴 때 하지 말걸…’하는 후회도 수백 번 들었다.


정말 쓸데없는 얘기지만 별의별 생각을 다 했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문장에 기대어 ‘전용관을 갖게 해 주세요’라고 빌었던 나의 간절한 기도는 우주의 기운이 모여 들어준 것 같은데, ‘망하지 않게 해 주세요’ 라거나 ‘수익을 내며 안정적으로 오래 운영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는 구체적인 내용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의 뒤늦은 후회 같은... 아직도 공연장 얘기만 하면 시니컬해지는 나의 웃기지도 않은 표현이 이렇다는 것이고, 공연장 운영을 준비하던 나는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다.


공연장 운영이 쉽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용관이니 우리 공연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 따위 하지도 않았다. 월 임대료만 5천만원이다. 공과금을 합치면 6천. 배우, 스텝, 직원 50여 명의 월급날은 매달 빠르게 돌아왔다. 공간을 쉼 없이 활용하여 매출을 발생시키기 위한 많은 대안을 기획했다. 공연예술을 가미한 리더십 프로그램도 기획해 운영했고, 일반인을 위한 백스테이지 투어와 청소년을 위한 전문가들의 강연, 공간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공연이 없는 시간에는 창간식, 기자간담회, 리셉션 등 대관도 진행했다. KBS 한류 매거진 창간식,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 오프닝, 안철수 대선 출마 선언, ‘개그콘서트’ 서수민PD와 ‘남극의 눈물’ 김진만 피디의 강연 등.


그러나 주변 환경은 시간이 갈수록 더없이 열악해졌다.

2000년 전용관을 오픈한 난타의 관객은 해가 갈수록 외국인 비중이 높아져 갔다. 여행사와 협약을 맺고 관광상품 안에 포함된 전용관 공연은 공연시장이 아닌 관광시장에 속해 있었다. 난타의 뒤를 이은 전용관 공연들은 17개로 늘어났고, 어느 순간부터 출혈경쟁이 시작되었다. 전용관은 300석 이하의 공연장에 4~5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공연이 대다수였고 하루에 많게는 3~4회까지 공연을 진행하고 있었다. 중국과 동남아의 단체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이 공연들은 서로의 살을 깎고 깎아 어느새 3천 원, 4천 원을 받으며 여행사에 공연을 팔았다. 출연료도 감당이 안될 공연비다. 공연장 임대료에, 기술장비 비용에, 배우들 출연료에, 홍보마케팅 비용에, 기술스텝, 티켓마스터, 하우스 스텝 인건비와 운영비에, 직원들 급여에, 공과금까지… 당시 그들은 누구를 위한 출혈경쟁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외국인들이 어쩌면 평생 한번 볼까 말까 한 한국 공연이 고급스럽길 바랬다. 한 개인의 욕심이었다.

90년대 초반 배낭여행을 시작으로 해외를 다니며 본 우리나라의 입지를 나는 늘 일본과 비교했다. 일본 레스토랑은 ‘외식Dining out하러 가는 곳'으로 데이트할 때 상대를 데려갈 수 있는 펜시하고 멋진 곳인 반면, 한국 식당은 '어쩌다 알게 된 한국 친구를 통해 소개를 받아서 가보니 음식은 너무 맛있으나 분위기는 데이트 코스로 정할 수 없는' 이미지로 자리 잡아 있었다. 일본의 공연은 (보면서 이해를 못하고 있는 와중에도) 뭔가 의식이 있고 스피리츄얼하며 고급스럽다는 평을 받고 있었고, 한국의 공연은 ‘너희 나라도 공연을 만들어?’라는 질문을 받아야 했던 그 시절…


한국의 고급문화를 알리고 싶다는 목표로 제작한 나의 명품 퍼포먼스를 나는 출혈경쟁시장에 내놓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고급화 전략으로 밀어붙여보자는 치기 어린 노력은 얼마 가지 않아 보기 좋게 실패했다.

여행사 입장에서는 관광상품의 단가를 낮추는 게 당연히 유리하다. 길어야 1시간~1시간 반을 차지하는 문화상품을 일부러 더 비싼 공연으로 채울 이유가 이들에겐 없다. 이 당연한 사업적 판단이 나에겐 작품의 규모와 퀄리티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느껴졌다. 이에 더해, 이웃나라들과 우리의 외교관계는 점점 악화되어만 갔다. 고급화 전략으로 개별관광객(FIT/Foreign Independent Tour) 유치에 집중하던 시기에 일본의 혐한 감정은 팽배해졌고, 사드 배치로 중국 관광객도 극감 하기 시작했다.


나는 시작부터 잘못됐다는 생각을 한다. 전용관 사업을 결심한 이유가 '함께 하는 배우들이 나이가 들어가고, 하나 둘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안정적인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니... 해외 공연은 겉보기에 좋을 뿐 한 가정의 가장이 생계를 책임질 만큼의 안정된 수입을 보장해 주지 못했다. 의도가 나쁘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나쁜 결정이었다. 회사는 폐업의 수순을 밟았고 나는 수십 명의 배우, 스텝, 직원들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잃는 아픔을 경험하게 한 사람이 되었다. 공연장은 나에게 나의 판단에 대한 후회와 엄마를 잃은 기억과 70년대 후반 엄마 손잡고 처음 만든 통장을 빼앗아간 곳이자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채무를 남긴 곳이 되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공연장 주변으로 다니지 않았다.


세상에 오는 순서도 가는 순서도 정해져 있지 않다고는 하지만, 나는 어느새 흰머리와 흰 수염이 가득해진 친구와 브런치를 먹으며 상실과 죽음을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윌리엄과의 공연장 이야기는 지극히 객관적인 한국의 외교상황과 산업적 구조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 지었다.





평소 같았으면 쉽게 끝을 보았을 사워도우 토스트Sourdough Toast가 반쯤 남아 있었다. 나는 빵 위에 있는 아보카도와 연어를 빠르게 골라 먹고 플레이트를 옆으로 밀어 놓았다. 카푸치노 잔을 앞으로 당겨오며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Cafe Rouge, Edinburgh


나는 작년까지는 크게 관심 갖지 않았으나, 올해 부쩍 눈에 띄는 ‘시즌’ 공연에 대해 물어보았다.


사우스 아프리칸 시즌South African Season을 하던데, 시즌 공연은 뭐가 달라?


그때까지 우리가 일하는 방식은 이랬다.

우선, 내가 제작한 작품이나 해외시장에 진출하고자 하는 한국 공연 중 가능성이 높은 작품을 윌리엄에게 소개하고, 어셈블리의 프로그래머, 프로듀서들과 의견을 나눈다. 작품의 와우 포인트Wow-point와 윅 포인트Weak-point를 분석하고, 홍보마케팅으로 부각시킬 부분에 대한 의견도 교환하고, 어느 규모로 어떤 극장에 어느 시간대에 배치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지 의논하고 함께 최종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협의는 전년도 12월부터 해당 연도 2월까지 진행되었고, 그 후로 5개월간의 준비과정과 8월 한 달간의 공연을 진행해 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많아야 1~2 작품을 최종 선정해서 선보였고, 어셈블리와 연합인 Big 4 공연장에도 각 공연의 특징에 맞는 타임슬랏Time slot을 매칭해 몇 개의 공연을 상연하곤 했다.


“해당 국가의 공연을 장르별로 선별해서 다채로운 문화를 선보이는 목적으로 시즌을 진행하지. 어느 프로덕션에 집중된 하나의 작품을 올리는 게 아니니까.” 윌리엄이 말했다.

“그래? 우리는 벌써 10년 넘게 공연을 같이 올리고 있는데, 왜 나랑 ‘코리안 시즌’ 하자고 안 했어?”

“네가 하자고 안 했잖아.”

“아… 그렇구나. 그럼 우리도 코리안 시즌 하자.” 나는 웃으며 제안했고,

“그래” 하고 윌리엄도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한 장짜리 협약서를 쓰고, 1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2015년부터 코리안 시즌을 진행하기로 약속했다.


해외 공연을 다니기 시작한 1999년부터 나의 억울함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한국 공연을 처음 접한 외국인 관객들은 공연을 즐기면서도 국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아시아에서 온 공연이구나…’가 전부일 때가 많았다.


그냥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차라리 억울하지는 않을 텐데… 몇몇 관객은 공연이 끝나면 다가와,

“Is this from China? Or Japan? 중국 공연인가요? 아님 일본 공연?”이라고 물어왔고,

“We’re from Korea! 한국에서 왔습니다!” 라고 답하면,

"Oh, We didn't know there's a show in Korea. 한국도 공연을 만드는 줄 몰랐어요."라는 어이없는 이야기를 듣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에도 지금도 나는 우리나라가 문화강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미국의 브로드웨이와 라스베이거스, 영국 웨스트앤드 이외에 백개 이상의 공연장이 모여 있는 도시, 매일 새로운 콘텐츠가 상연되는 도시가 한국의 서울 외에 또 어디에 있는가.

나의 억울함은 한국의 문화를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욕심으로 바뀌었다.


에든버러의 어셈블리 공연장은 진입 문턱이 높기로 유명하다. 매년 2천 개의 공연이 어셈블리 공연장에 신청서를 제출하고, 그중 2백 개의 공연이 선정되어 상연된다. 프린지에는 선정과정 없이 대관료만 내면 공연할 수 있는 공연장도 많다. 무한경쟁의 축제 환경에서 최고의 공연장에서 공연한다는 건 출발선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공연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 건 아니며,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작품성이 없는 건 아니다.

당시 나는 10여 년간 어셈블리와 함께 대중에게 사랑받는 ‘잘 팔리는 공연’을 선보였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매년 몇몇의 한국 공연이 축제를 찾아와 이름 없는 공연장에서 이름 없이 공연하고 가는 것을 목격했다.

누군가는 에든버러에서 공연을 올리는 게 꿈이라고 했고, 그 꿈을 위해 넉넉하지 않은 예산으로 혹은 부채를 안고 힘겹게 세계의 무대를 두드린다.


2013년 에이투비즈와 어셈블리의 ‘코리안 시즌’ 협약으로 우리는 한국 공연을 조금은 유리한 출발선에 세우는 기회를 만들었다. 공연장이 수십 년 동안 공들여 쌓아 올린 신뢰를 등에 업고 한국의 다양한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파이가 마련된 것이다. 그 날 깨달았다. 누군가 먼저 손 내밀어 제안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2014년 12월 우리는 제1회 코리안 시즌 공고를 올리고, 공연팀들로부터 신청서와 소개자료, 동영상이 첨부된 지원서를 받고, 퍼포먼스, 피지컬 시어터, 음악, 무용, 전통공연 등 장르별로 3 배수 공연을 1차 선정했다. 나와 윌리엄을 포함한 5명의 선정위원이 1차 선정한 공연들의 풀영상을 보고 (또 보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고, 그렇게 5 작품을 최종 선정했다.

2015년 첫 선을 보인 ‘코리안 시즌’은 현지에 성공적으로 론칭하였고, 매년 브랜드 가치를 쌓아가고 있다.

2019년 72년 역사의 프린지는 전 세계 63개국에서 참여한 3,800개의 공연이 320개의 공연장에서 6만 회의 공연을 마쳤고, 제5회 코리안 시즌도 4개의 트로피와 현지 언론의 최고 평점을 받으며 한 달간 126회의 공연을 마쳤다.


모두를 위한 축제는 서로의 벽을 허물고, 지구온난화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담아내며, 각기 다른 환경에서 생활하는 우리의 삶에 대한 질문과 해법을 다룬다. 서로의 문화에 대한 이해는 세상의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해해야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성장했고, 그 성장이 멈추지 않길 기도한다.



PS.
2020년 4월, 에든버러로부터 ‘축제 공식 취소’라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도쿄올림픽이 취소되고, 유럽에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다. 2020년 2월 제6회 코리안 시즌의 최종 선정을 마치고 작품의 업그레이드와 홍보마케팅 소스를 준비 중이던 5개 공연의 준비기간은 그렇게 일 년이 늘어났다.


by 엔젤라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