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gelo Feb 12. 2021

세파에 쪄들수록 느끼는 바가 크다 - 소울(2021)

간절히 바라던 일을 이루어졌음에도

성취감이 의외로 작았던 적이 있다.


나에겐 다좋았다던 프랑스, 파리 그랬다.


십수 년이 넘도록 유럽여행을 갈망해왔

마침내 열흘 남짓 여기저기 누비는 행운을 누리게 됐다.


하지만 감동의 크기는

내가 꿈꿔왔던 시간에 비례하지 않았다.


관광지에서 기록을 남기듯 사진을 찍고

가이드북에서 추천한 맛집을 방문하고

티켓을 구매해 1일 3박물관을 시도하는 등

짧은 시간 혹사하듯 여행한 탓일까.

아니면  구글링으로 선행학습을 많이 한 탓일까.


정작 기억에 남는 값진 시간은 따로 있었다.


스위스로 떠나던 야간열차 안에서

중복되거나 흔들린 사진을 삭제하고

민박집 사장님이 챙겨준 도시락을 먹고

바리바리 챙겨둔 브로셔를 정리했던 일.


파리에서 보낸 시간들이

추억으로 편입되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커뮤니티에서 회자되는 명언

'여행 계획 짤 때랑

나중에 썰 풀 때가 가장 재밌었다'

 법칙이 그대로 내게 적용됐다.


예상치 못한 다른 경험들이

생각지 못한 소소한 감동을 주었지만

여행의 main dish였던 파리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유럽여행은 나의 '불꽃'이 아니었다.





쳇바퀴 같은 대한민국 직장인의 일상에서

여행 같은 짧은 일탈이 삶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며칠간 달라질 순 있어도

사회적 존재와 주변 환경은 그대로니까.


코로나가 유행하던 이전에는

1년에 한 번 떠나는 해외여행을

수도자의 안식년처럼 신성시하며

지루한 일상을 견뎌내던 직장인이 많았다.

15일의 시간들을 위해 350일을 태운다는 느낌으로.


혹사하듯 빡빡한 일정과

과하다 싶은 사진을 남기는

한국인 특유의 여행법이

어쩌면 이런 이유에서 탄생한 게 아닌가 싶다.


여행은 고단한 일상을 견뎌낸 나에게

잠깐 주어지는 구원의 시간이기에

많이 먹고 많이 남기고 많이 봐야 한다는 것.


슈퍼마리오 게임의 무적 시간을 생각하면 된다.



여행의 일탈 같은 시간이 주는 약 빨은

길으면 몇 달, 대개 몇 주 이내로 소모되고

다시금 우리는 일상으로 편입된다.


이듬해의 여행을 계획하며 또다시 일상을 견뎌내지만

작년과 올해 코로나 직격타를 맞으며

나 같은 '존버 여행족'은 결국 gg를 쳤다.


불행히도 내겐 22호 같은 기연도 없었고

재즈 연주 같은 달란트도 있지 않았으며

되려 하수구에 빠지는 통증 같은 나날만 반복되었다.


영화 소울의 주인공 조 가드너는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직장인대변한다.

목적을 위해 제 살 깎아먹기 식으로 살며

마침내 뜻한 바를 이뤘음에도

밀려오는 허무함에 당혹감을 느낀다.


세파에 찌든

'영혼을 잃어버린' 어른일수록

영화가 주는 울림이 클 것이다.


반면 영화가 준 감동이 컸던 만큼

씁쓸한 기분도 주었다.

소울이 말하는 주제의식이

위로감 이외에는 아무것도 와 닿을 수 없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많은 것 같아서 그렇다.


나를 포함해서.




행복을 수치화할 수는 없겠지만

상대적으로 비교해보자면 내 나라의 보통 사람들은

타국의 사람들에 비해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산율이 내 주장을 증거 한다.


직장인이 되어도 딱히 행복하지는 않다.


입사 전에는 직장인이 되길 선망하고

재직 중에는 퇴사한 동료를 부러워하며

퇴사 후에는 좋은 소식 전할 일이 뜸하다.


취업을 목적으로 십 년이 훌쩍 넘는 빌드업을 거쳤지만

밀려드는 허무함과 회의감에 허우적 댄다.


목적지향적인 삶에서 정작 중요한 걸

잃어버렸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인간 항상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인데,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라고 다.


아등바등 살며 삶의 단기적인 과업은 이루었지만

정작 행복감을 느끼는 건 쉽지 않다.


삶의 목적이라는 걸

타인과 사회에게 주입받은 사람에게는 특히 더 그렇다.


소울의 조 가드너처럼

뉴욕에 살며 절륜한 연주 실력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렇지 못하다.


일상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기에는

목적을 이루려는 욕망은 너무나 거대하고

열악한 상황에서 주위의 경쟁자를 이기려면

수면을 줄이고 유흥을 끊고 의무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나만 럴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감동도 크지만 오함마로 뼈를 맞은 느낌도 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상을 제물로 바치고

본성을 억누르며 살아온 나 같은 사람에게

영화 소울이 game changer가 되어줄 수 있을까?


꼭 그러길 소망한다.


어쨌든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과 불화하는 남자의 영화 - 더 레슬러(200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