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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o Sep 11. 2020

의료진 갑질에 대해 썰푼다

싸인 받으려고 줄 서는 심경이란...

그리스의 유명한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에게 어느 날 적국 페르시아의 외교관들이 찾아왔다.

페르시아에 퍼진 전염병을 막아달라고 금은보화를 안겨주며 간곡히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히포크라테스는 대답했다.


"머리에 든 지혜는 황금보다 귀한 것이오.

 나는 그리스를 침략한 나라 사람을 치료할 수 없다."


히포크라테스는 그들이 건넨 황금과 보석들을 발로 밀어버리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 페르시아인들의 선물을 거절하는 히포크라테스 (Anne-Louis Girodet De Roussy-Trioson, 1792)




원본 해석과는 달리 나는 저 그림을 보고 의료진과 구급대의 구도가 떠올랐다.


구급대가 데려간 환자를 대하는 의료진의 모습, 어떻게든 환자를 인계하려는 구급대원의 모습.

아쉬운 게 없다는 듯 방문한 환자와 구급대에게 불친절하고 퉁명스러운 의료진들과

어떻게든 빨리 환자를 인계하고 떠나려는 구급대를 떠올렸다.


내가 처음 구급대원이 되었을 때만 해도

병원과 구급대는 밀월관계에 가까웠다.

심지어 김영란법이 생기기 전만 해도.

병원에 환자 이송하러 가면 원무과 직원이 내려와 환자 좀 많이 데려와달라고

뭐라도 챙겨주려는 모습을 보였고

어떤 병원은 원내 커피숍에 구급대원 장부를 만들어 커피를 무료로 제공하기도 했다.

복도에 카트를 꺼내놓고 의료진이 달라붙어 어떻게든 서로의 수고를 덜어주려 노력했다.

젊은 남자 소방관들과 응급실 간호사 커플도 많았고 이 중에는 연이 닿아 부부가 된 케이스도 적지 않다.


https://wooris.tistory.com/893


그런데 어쩌다 이 모양 요 꼴이 됐을까.


이미 예상했겠지만,

2020년의 코로나 때문이다.


구급대가 응급실에 환자를 데려가면 먼저 선별 진료소를 거쳐 흉부 X-RAY를 촬영한다.

이동 가능한 기기를 방사선사가 들고 와야 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

판독 후 코로나 관련 의심 소견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원무과에 접수를 한다.

접수가 되고 나서야 응급의학과 의사가 초진을 보고 난 후 해당 의사에게 환자를 인계받았다는 서명을 받는다.


이 과정이 적게는 30분, 많게는 2시간까지 걸린다.


코로나 의심증상으로 인해 환자가 격리실에서 진료받아야 하는 경우가 있는대 격리실이 꽉 찼다면?

환자랑 구급차 안에서 자리가 생길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게 된다.

관내의 차량 공백을 우려해 우리는 이렇게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환자를 두고 복귀하면?

인계도 안 하고 환자를 버리고 갔다고 병원에게서 항의 전화와 민원을 받게 된다.


119구조·구급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제18조
‘구급대원이 응급환자를 의사에게 인계하는 경우에는 구급활동일지를 작성하여 인계받은 의사의 서명을 받고 그 의사에게 구급활동일지를 제출하여야 한다'


골든타임을 지키기 위해 사이렌을 켜고 신호를 위반해가며 환자를 탑승시켜 병원에 가더라도

정작 병원 응급실에서 응급하지 않게 시간이 딜레이 된다.

관할 구급차가 병원에서 수시간을 대기하며 생기는 공백에 대해 모두가 문제의식은 갖고 있지만

딱히 변한 게 없는 걸 보면 뚜렷한 묘수가 없는 것 같다.


구급대는 의료기관의 산하 기관이 아니고 하위 업무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왜 구급대가 서명 지연으로 인해 수시간을 대기해야 하는 의료진의 갑질에 시달려야 하는가.

갑질의 원천은 인계 후 받아야 하는 '의료진 서명'에 있다.


마치 초등학생이 일기장을 선생님에게 검사받고 참 잘했어요 도장받듯

이송한 환자에 대해서 선별 진료소 간호사에게 1차로 인계하고

원무과에서 미수금이 없는가 / 접수비를 지불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심사(?)를 통과하고

응급의학과 막내의사의 초진을 받는 동안 구급대원은 망부석처럼 환자 뒤에 서있어야 한다.

환자를 인계하는 입장에서 '여기다 서명하세요'라고 패기 있게 말하는 구급대원은 없다.

'여기다 서명 좀 해주세요. 흘겨쓰지 마시고 정자로 부탁합니다'가 거의 대부분이다.

상호 간의 '수고하십시오' 라던지 '현장활동 안전하게 하세요' 같은 덕담은 별로 없다.

어쩌면 의료진에게 구급대는 일거리를 적립해준 눈엣가시일 수 있고

구급대는 구두로 1차로 환자를 인계했음에도 최후의 순간에야 서명하는 의료진이 탐탁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인계'는 매우 예민한 사항이고

공무원은 문서로 업무를 말하기 때문에 행여라도 문제가 생기면

구급활동일지는 구급대원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명' 문제는 요즘 구급대의 핫이슈이다.

2020년 원더 키디가 우주로 떠나는 시대에 구시대적인 '서명' 외에는 대안이 없단 말인가.


환자 인계 지연으로 관내의 응급의료 공백과 구급대의 피로도 상승 같은 문제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음에도

119 법률로 구급일지에 서명받라고 내부적으로 지정한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손댈 수가 없다.




더 심각한 상황으로 아예 진료받을 병원 섭외 자체가 안 되는 경우에 대해서다.


응급의료 정보시스템에 분명히 빈자리라고 나와 있음에도 막상 전화해보면 입원 예정자가 있거나

자리가 없다고 오지 말라고 한다. 코로나 증상인 발열, 호흡곤란 증상이라도 있노라면

최소 5군데 이상을 전화하게 된다. 사정사정하게 된다.

이러는 사이 구급차 주들 것에 누워있는 환자상태는 점점 위독해지고 있다. 증상도, 감정도.


남의 일이라고 간과할 수 있는가.

언제든 내가, 내 가족이 당사자가 될 수 있다.

내가 이송한 환자 중에 어느 누구도 본인이

나를 만나 구급차 타고 응급실에 가게 될 줄

예상한 이는 한 명도 없다.


단지 코로나 때문일까? 코로나가 끝나면 과거의 좋았던 관계로 우리가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 아.. 아니다..-_-;;;

서로가 조직에서 가장 험한 업무를 담당하는 '을' 들인데 서로에게라도 잘해줬으면 좋겠다.

불가능하겠지만...


가슴의 푸른 멍에 피로와 무력감이 덧대어져 간다.   


웃대에 올라온 사진인데 코로나 전담 출동을 갔다가 귀소한 이후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  많은 응원과 격려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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