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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o Jun 23. 2023

최악을 예견하는 습관에 대하여

기승전결의 '기' 단계에서

이미 최악의 결과를 상상한다.


자포자기하는 건 아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서 매달리기는 한다.


녹봉을 받고 일하는 '업무'에 대해서는

마음가짐과 달리(!) 일단 최선을 다하기는 한다.

요즘 애들말로 souless, 영혼이 없다랄까.


이런 부정적인 업무  마인드장점은

기대가 없으니 어떤 당황스러운 일이 닥쳐도

저항감이 적고 상황 대처가 쉽다.


업무범위에 벗어나는 요구를 하거나

언어폭력에 준하는 갑질을 당하더라도

화도 안난다.


이미 예상했거나, 예상 그 이하이기 때문이다.


이런 업무방식의 단점보람이 없다는 것 정도?

성취감 또한 미미하다.


나의 업무는 119구급차를 운영하며

응급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것이다.


응급에 긴급이라는 표현을 쓰니 뭔가 거창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만난 신고자의 80%가량은

굳이 119가 필요 없는 사람들이었다.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3061514125116361


스스로 걸을 수 있고 활력징후가 지극히 안정적인 환자들.

하지만 응급실에 가겠다는 민원인들을

일개 공무원 나부랭이가 감히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특정상황, 외래가 예약돼있다던가

상습으로 등록되는 사람이 아니라면

가급적 이송해 드리는 편이다.


쉬워 보이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심정지? CPR 하면 된다. 힘들어서 그렇지, 하면 된다.

중증외상?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도와줘서 어떻게든 된다.


나를 후달리게(?) 만드는 건

'전체출동의 80%를 차지하는 비응급 환자'

중에 간혹 나타나는,

생각지도 못한 '찐응급' 케이스다.


기억에 남는 출동 건들은 죄다 이 분들이다.


예를 들자면

어지러움으로 신고한 환자가

알고 보니 편마비를 동반한 급성뇌출혈이었다던가,

술 취한 사람 상태라도 확인해 달라고 해서 가봤더니

자살목적의 약물중독이었다던가...


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나는 출동을 나가기 이전에

최악의 상황을 염두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 버릇은 눈앞에 보이는 상황 그 이상을

상상하게 만들어준다.


이것이 부정적인 사고방식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과하다 싶을 정도의 진단검사를 행하는

우리나라 응급실의 업무 스타일과

나의 사고방식은

의외로 궁합이 잘 맞는다.


아이러니 하게도.




일교차가 심한 3월 중순의 야간근무였다.

새벽 3시경 출동지령 방송이 울렸다.

출동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OO맨션 / 여자 본인 임산부 양수 터짐 /

임신 주수 모름 대화협조불가'


한 줄 남짓한 짤막한 지령에 많은 정보가 담겨있다.

해석해 보자.


OO맨션은 우리 관할구역에 위치한 상습신고지역으로

주거환경이 굉장히 열악하다.

그곳에서 만났던 신고자들은

대부분 사연이 있는 환자들이었다.

지금 신고한 산모의 경우 양수가 터져 출산이 임박했고

진통으로 인해 원활한 협조가 불가하다는 것.

몇 주차 임산부인지 모른다는 건

꾸준히 산부인과에 다니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환자 본인이 신고했다는 건

보호자가 같이 있지 않다는 것.


이것만으로 충분히 골치 아픈 상황인데,

현장에서 만난 환자의 발언이

화룡점정을 찍어 주었다.


"대원님... 저 이 아이.. 낳고 싶지 않아요."


귀를 의심했다.

산모가 출산을 원하지 않는단다.

애초에 원치 않는 임신이었다고.

지령서만 읽고는 차마 예상치 못했다.

혼자 출산한 아기를 몰래 유기하거나,

베이비박스를 종교단체에서 운영한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슬프게도 현장에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발상이었다.

저희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냐고 환자에게 물어봤더니

낙태수술이 가능한 병원에 데려다 달란다.

119에 전화하면 해줄 줄 알았단다.


아... 러시안룰렛 게임을 하다가

머리에 공포탄이라도 맞으면

지금처럼 머리가 아플까?

일단 구급차에 태워 환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양수가 터진 이후 산모의 진통은

규칙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가진통이 아닌 진진통.

출산이 임박했다는 징후이다.

보호자는 없다. 부모님이 계시지만 알리고 싶지 않단다.

다니는 병원은 없다.

새벽시간에 병원마다 일일이 전화해서

응급분만이 되는지 알아봐야 한다.

신분증을 받았다. 확인해 보니 미성년자는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인근에 위치한 산부인과 전문병원에 먼저 연락을 했다.

내원해도 되겠냐고. 급하다고.

하지만 본인들의 병원에 다니는 환자가 아니면

받을 수가 없단다.

24시간 야간분만이라는 간판을 달고 영업하는 병원이지만

'저희 병원에 다니시는 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병원에서 오지 말라는 데 무턱대고 밀고 들어갈 수는 없다.

출산을 원치 않는다는 말은 언급조차 못 했다.


대학병원 응급실 의료진들 역시 난색을 표했다.

환자를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자체적으로 정할 수는 없다며

알아보고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답변했다.

선별진료 담당자가 쉽사리 정할 수 없는 문제 이긴 했다.

환자의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

시간이 갈수록 절규에 가까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환자의 병원선정을 도와주는 구급상황관리센터에 연락했다.

구급상황관리센터 담당자에게 현재의 상황을 설명했다.

내 절박함이 구구절절이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담당자분도 몹시 당황해하셨지만

일단 공립병원 의료진과 핫라인으로 얘기해 보겠단다.

수용 가능 여부 관계없이

나는 그 병원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골 때리는 상황에서

그나마 환자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공립병원이기 때문이다.


병원비 지불능력과 보호자가 부재하더라도

응급의료비 대납제도나 구청복지과 지원을 받기 수월하고,

국가에서 운영하는 병원임에도

의료진 수준이 독보적인 병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나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병원 입구에 진입할 때쯤에

진료가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늦은 새벽이라 수술방이 확보되지 않을 수 있다.

산부인과 의료진이 부재할 수도 있다.

이해할 수는 있어도

내 안에 솟구치는 분노와 짜증은 감당할 수 없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환자를 바라보았다.

환자는 측면으로 비스듬히 누운 상태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병원을 알아보려는 노력은 이제 다했다.

보호자라도 있었다면, 출산할 의지가 있었다면

어떻게든 되었을 텐데...

원망스러운 감정을 차마 숨길 수 없었다.


인적사항 파악을 위해 받아둔 환자의 신분증이 보였다.

앳되고 여린 얼굴의 여자가 웃고 있었다.

파란색 배경에 올림머리를 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여자.

고통에 몸부림치는 눈앞의 환자.

이 둘이 대비되며 원망이 애잔한 마음으로 바뀌었다.


일단은,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보자.

심호흡을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상황이 아니라

증상이 아니라

사람을 보자.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존귀한 인격체로 여기고

최선을 다해보자.

출산이 끝날 시점에도

병원이 정해질 것 같지 않은 불안감 속에

나는 구급차 안에서 분만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동료 구급대원에게 영상통화로 의료지도를 부탁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환자에게로 다가갔다.

"환자분 똑바로, 하늘 보고 누워 보시겠어요?"

주들 것 위에 수술포를 깔고 분만장비를 펼쳤다.

환자가 출산을 원치 않고

갈 병원이 정해지지 않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지금부터는 본인의 탄생을 위해 발버둥 치는 태아의 몫이다.

나는 순리대로, 지침대로 행할 뿐이고

어른들의 사정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자궁 내 태아의 자세가 정상위이기를,

출산이 지연됐더라도 건강에 이상 없기를 바랐다.


비장한 마음으로 양손에 베타딘 소독액을 들이붓고

손가락을 하늘로 향했다.

소독제가 마르는 몇 초 사이가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내 입술도 마르고, 심장도 말라갔다.

구급차 내에서 분만을 시도하는 게 처음인 탓이고

비스듬히 옆으로 누운 자세를 고쳐 눕지 않는 산모 탓이다.


"환자분... 저 믿고... 똑바로 누워 보시겠어요?"


공허한 메아리였다.


한 생명의 탄생을 앞에 두고

구급대원과 어머니라는 신분을 가진 두 사람의

기묘한 대립이었다.




그때였다.

반장님.

반장님!!!

운전요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뭔가 실수했나? 아직 한 것도 없는데?

... V병원으로 이송하랍니다.

뭐라고?

무전 나왔습니다. 지금 바로 V병원으로 출발하겠습니다.


몰래카메라 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상황이 진행됐다.

V병원까지의 거리는 현재 위치에서 5킬로 남짓.

새벽시간임을 감안하면 10분 내외로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환자의 상태를 확인한 바

태아의 머리가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무리하게 차량에서 분만을 시도할 필요가 없어졌다.


환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조금 늦었지만, 병원이 정해졌다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환자분이 산부인과 의료진과

만나게 해 드리는 것이고

그다음부터는 환자분의 몫이라고.

비록 원치 않는 임신이라도

환자분께서 올바른 선택을 하셨으면 좋겠다고...


이송하던 중에 몇 군데의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진료가 가능한 지 알아보겠다고 했던 병원들 중 일부였다.

일단 오시라고.

보호자는 나중에 확보할 테니까 내원하시라고.

이미 갈 병원이 정해졌다고 대답하자

병원 의료진들은 서둘러 통화를 종료했다.

아마도 승모근이 뻣뻣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긴장감이 어느새 사라지고 감사함이 내 마음을 채웠다.


병원 알아봐 주신 구급상황관리센터 주임님.

환자 케어하느라 무전 한번 못 날렸음에도

차량동태 변경해 주고 V병원 가면 된다고

두 번 세 번 확인해 주셨던 상황실 주임님.

어려운 결정을 하여 환자를 받아준 V병원 의료진.

뒤늦게나마 자기 병원으로 오라고

전화 줬던 다른 병원 의료진들.

병원 침대로 옮겨지기 직전

고맙다는 인사를 스치듯 건넨 환자와

본능으로 이 상황을 견뎌냈을

뱃속의 아기에게까지 깊은 감사를 느꼈다.


만약 이 병원에서 환자가 출산을 하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

나는 이제 '최악의 상황'을

시뮬레이션하는 습관을 그만두련다.


부정적으로 사고하면 내 마음이 덜 다칠 수는 있겠지만

감사를 인지하는 기민함이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네 일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배려 속에

유지되는지 평소에는 잘 깨닫지 못한다.


극단의 상황에 처해서야 알 수 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무난하게 살고 있는지를.


고마움을 느껴본 사람만이 누군가에게

진심을 담아 도움의 손길을 건넬 수 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면책면피만 생각하다 보면

내게 향해 있는 올곧은 길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누군가 건넨 손을 마주 잡고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낼 수도 있는데...


환자를 의료진에게 인계하고

장비를 정리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센터로 귀소하려고 차량에 시동을 걸었다.


어느새 새벽이 저물고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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