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gel Oct 17. 2020

서울 토박이의 전원주택 구하기 - 2

생각보다 시골도 싸지 않더라..

나중에 바닷가에서 살아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에 철퇴를 가한 건 2016년 자주가던 양양의 한 서핑샵이었다. 밤마다 파티가 벌어졌던 해변을 중심으로 수많은 카페, 서핑샵, 펜션 등이 공사 중인 것을 보면서 "아..벌써 발전하면 땅값 오르는데.."라는 생각이 스쳐간 것이다.


서핑을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서핑샵은 해변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있다. 며칠 머물면서 친해진 사장님께 이쪽 부지는 얼마나 하는지 묻자, 당시에 평당 300만원 정도라고 한다. 흐엑!! 300만원... 100평에 3억?! 응당 시골은 평당 10만원이면 된다라는 개념없는 생각을 했었기에 정신이 번쩍들었다.


2016년 양양의 해변. 서퍼들이 제법 많다. 이 해변 뒤쪽이 당시 평당 300만원 정도


그런데 집에 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평당 300만원은 좀 비싸단 생각이 들었다. 평소 언젠가 바닷가 근처로 내려가서 살겠다라는 말을 주변에 하다보면 부동산에 대해 권유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때 기억을 더듬어보면 평당 300만원은 시골기준 서울 강남 수준에 달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지금 생각하면, 서퍼들이 몰리는 해변은 양양의 강남이 맞긴 한것같다).


그 서퍼샵 사장님을 만나기 1년쯤 전이었나, 부동산 투자를 좀 하시던 지인이 나에게 여유돈이 있으면 강원도 국회연수원쪽에 땅을 좀 사보는게 어때?라며 권유한 적이 있었다. 대략적인 얘기로 6천만원 정도만 투자하면 어느정도 집을짓고 살거나, 상가주택을 지을 정도는 살 수 있다고 한다. 당시 창업을 시작해 고분분투하던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고민끝에 거절을 했었다.


또 한번은, 아버지가 저녁에 들어오시더니 알고 지내던 교수 한명이 제주도 바닷가 앞에 땅을 샀다며, 내가 관심있으면 옆 필지를 평당 100만원에 소개해 주시겠다고 했다. 강원도에 땅을 안샀던게 내심 마음에 걸렸던 나는 혹시 50평만 살 수 있냐고 여쭤봤는데.. 땅이 거래될때는 보통 '필지'로 된다는것도 몰랐기에 할 수 있었던 용감한 발언이었다. 당시에도 창업을 하고 있었던지라 항상 돈이 필요했던 상황이었는데,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면 아마도 한 필지를 구매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저 제주도 땅은 지금도 아쉬운 마음만 든다.

제주도의 해변. 어쩌면 이런 땅을 이미 가지고 있었을지도....


저 두번의 단편적인 경험이 있다보니, 당시 평당 300만원은 나에게 서핑 특수에 편승한 부동산 거품으로 느껴졌다(당시 부지가 지금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양양이 더 핫해진 만큼 더 오르지 않았을까 싶다).


시간은 흘러 2019년이 됐고 여전히 투자금을 회수는 못했지만 창업한 회사는 겨우겨우 굴러갈 정도는 됐다. 아직 애널리스트때의 연봉에는 비할바가 못되지만, 당시 배운 투자 지식으로 줄어든 연봉을 조금이나마 메우며 소소하지만 즐거운 삶을 보내고 있었다. 늦은 일요일밤 리모콘을 돌리다 강원도 속초,양양쪽에 집을 구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고, 바닷가는 아니지만 꽤 괜찮은 2층집이 3억 정도에 소개됐다. "어? 대지가 150평에, 2층집이 3억원?? 그럼 굳이 바닷가가 아니면 대출받고 그러면 전원주택을 나도 살 수 있는거자나?" 이후 '구해줘홈즈'는 나의 본방사수 프로그램이 되었으며, 여기에 소개된 집들을 아버지와 이야기하며, 비로소 격동기를 보내온 부모님의 지식들을 전수받게 되는 계기가 된다.

2003년 필리핀 세부에서 한달간 머물던 어학원. 내가 원하던 집과 마당 규모다


제주도 혹은 양양의 바닷가 토지는 이제는 너무 비싸 살수가 없고, 경남 혹은 전남은 너무 서울과 멀어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꿔서 바닷가는 아니더라도 자연이 가까운 곳의 땅이나 주택을 사면 되는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자 선택의 폭이 순식간에 넓어졌고, 매주 구해줘홈즈에 소개되는 다양한 지역의 주택들도 대략적인 예산을 머리속에 그리게 해줬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중, 2020년 봄, 코로나로 인해 각국의 국경이 닫혔다. 나는 회사를 나와 무역회사를 창업해 수입 및 유통에 주력했었는데, 회사의 주요 업무들이 중단된 것이다. 의외로 고통의 시간은 길지 않았는데, 수입유통업의 낮은 마진과 끊임없이 필요한 자금, 창업자로서의 압박감 등으로 약 7년여간의 시간을 뒤로하고 휴업을 결심했다.


사무실을 비우고 마지막으로 찍었던 사진. 봄날의 햇살이 좋아보인다


사무실을 비우던 날은 날씨가 참 좋았다. 사람마음이 잼있는게 밖에 나오니 봄날의 내리쬐던 햇살이 참 따뜻했고, 일단 내일부터는 출근을 안해도 된다는 사실에 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그래, 직장생활 7년, 창업해서 7년 달렸으면 좀 쉬자"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한때 증권사 애널리스트로 그리고 잠깐은 주목받았던 청년사업가로 지내온 14년의 결과는 정리된 인간관계와 폭넓은 경험, 그리고 그간 180만원 정도를 적금에 꾸준히 납부했다면 모았을만한 현금 뿐이었다.


더이상 청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30대 후반에 맞이한 백수생활은 생각보다 할만했다. 평소 관심있던 제과제빵 학원을 다니며 소확행도 즐겼고, 친구들은 위로해준다며 술도 많이 사줬다. 예전 본업을 살려 천만원 정도를 투자했던 주식잔고는 3배가 늘어 연말까지 생활비 걱정도 해결했다.


무엇보다도 늦은 백수생활이 주었던 축복은 아버지와의 대화가 늘어난 것이다. 보통의 자녀였던 나는, 창업을 시작한 뒤로 이것저것을 아버지에게 물어볼 수 밖에 없었는데 뒤늦게 고생길에 접어든 자식이 걱정되셨는지 이런저런 조언과 몇몇 친구분들을 소개시켜 주시곤 했다. 환갑이 훌쩍 넘으신 아버지의 친구분들은 나를 무척 반겨하셨는데, 예전 고등학교 시절과 어머니와의 연애시절 등 비밀얘기들을 해주셨고, 나는 그걸 아버지에게 일러바치며 소소한 재미를 느꼈다.

아버지와 즐겨먹던 참치회


봄, 여름을 보내며 집 안팎에서 술도 종종 마시고, 같이 뉴스보면서 욕도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당연히 집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아버지는 젊은애가 왜 벌써 전원주택을 사려고 하냐며 핀잔을 주시면서도, 부암동은 집값이 안올라서 싸다거나 양평이 1급수 보전지역이라 환경이 좋다, 시골마을 잘못가면 텃세에 시달린다 등등 이른바 '썰'들을 많이 풀어주셨다. 미래가 불투명해진 나로서도 서울 출퇴근 거리를 벗어난곳은 부담이었는데, 이렇게 된거 시간 있을때 여기저기 부동산 시세가 어떤지나 좀 알아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2020년 9월, 대한민국에 또하나 부린이가 탄생했다.


작가의 이전글 서울 토박이의 전원주택 구하기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