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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죠앙요 Mar 12. 2023

정리

(49)

재요에게.


정리를 잘 못 하고 안 하는 편이라고 늘 생각해 왔어. 한동안 나에게 정리는 마치 ‘청소’와 비슷한 의미로 인식이 되던 말이었거든. 청소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는 편이라서 정리도 마찬가지인 줄 알았지.


근데 언젠가부터 내가 특히 신경 쓰는 ‘정리’의 영역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돼. 예를 들어 난 ‘시각적인 정리’, 그러니까 일종의 디자인적 관점에서의 정리에 꽂힐 때가 많아. 합의해서 결정한 이상 그 양식으로 통일되는 게 중요할 때도 많고 반대로 잔뜩 불규칙한 와중에도 톤이 조화로울 수 있도록 정리하는 걸 좋아해.


회의록처럼 간단한 문서에서도 각 요소들의 크기와 정렬이 맞아떨어질 때 느껴지는 정리의 쾌감이 있더라고. 정형적이고 비정형적인 것을 떠나, 내 취향에 따라 시각적으로 정리해 낼 때가 재밌어. 반대로 누군가 그런 정리를 하지 못하게 한다면 상당히 힘들 거야. 약간 어렸을 때부터 밥그릇에 다른 반찬이 묻는 걸 싫어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아. 누군가 멋대로 내 밥에 반찬을 올리면 그렇게 불만일 수가 없었어.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기준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전혀 정리처럼 보이지 않거나 아니면 별거 아닌 것에 크게 집착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어. 근데 어떻게 보면 대부분의 정리는 주관에 따른 행동이니, 어차피 하나의 정해진 답이 있는 건 아니겠다.


아, 그리고 결과적인 모습에 대한 기준치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정리의 속도와 주기도 결정적인 차이인 것 같아. 나는 결코 책상 정리를 빨리, 자주 하는 편이 아니라서 아무래도 정리되지 않는 상태의 책상이 더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지만 분명 깔끔하게 정리를 하기는 하거든, 아아주 가끔씩. 그리고 방을 청소하는 것도 난 한 번 할 때 굉장히 오래 하는 편인데, 손도 행동도 그렇게 빠르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일단 시작하면 완벽하게 하려고 해서 그렇기도 해.


쓰다 보니 나의 정리에 대한 약간의 변명이 되어가는 느낌인데, 여하튼 난 누구에게나 ’나름의‘ 정리가 있다고 믿는 구석이 있어. 사회적으로 쉽게 이야기되는 ’그’ 정리는 아닐 수 있지만, 누군가는 숫자를 잘 정리하고 또 누군가는 생각을 잘 정리할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서랍을 잘 정리하고 누군가는 옷매무새를 잘 정리하겠지. 꼭 정리를 잘해야 하는 건 아닐 텐데도, 정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결국 정리 비슷한 것들을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네.


다음 주에는 ‘신발‘에 대한 글을 적어 줘.


2023.03.12.

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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