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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Aug 20. 2021

집술

주도(酒道) 보다 중요한 것

술은 부모, 어른에게서 배워야 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보수적인 편이었던 나의 부모님은 정말로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 흔하다는 ‘고3 백일주’도 먹어보지 못했다. 대학에 간 후에는 내가 알아서(?) 술을 마시고 다닌 통에 딱히 부모님께 주도(酒道)를 배운 일은 없었다.

학교나 회사에서 선배들을 통해 조각조각 배운 주도에는 ‘술을 마실 때는 서열이 낮은 사람이 몸을 살짝 돌리고 마셔야 한다’,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다음날 이야기하지 않는 법이다’, '첨잔(添盞) 하지 않는다' 같은 널리 알려진 것들 외에도 ‘윗사람에게 술을 따를 때는 병을 잡는 손으로 술의 상표를 가려야 한다’ 같은 다소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사실 나는 술을 많이 마시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인 직장 생활을 했다. 남초 업계, 그중에서도 영업팀에서 몇 년간 마신 술은 그 양만 해도 족히 1천 리터 이상 될 것이다. 모두가 주도를 지켜가며 술을 마셨는데, '첨잔 하지 않는다'는 '그러니까 원샷을 해야 한다'가 되었고, ‘강권하지 않는다'와 '경쟁하듯 마시지 않는다'는 주도에 없었다. 선후배들과의 술자리나 팀 회식과는 또 다른, '영업용' 술은 버티고 견디고 이겨야 하는 그 무엇이었다. 있었던 일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한 마디로, 술은 꼴도 보기 싫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술을 마셔보았고 별의별 일을 겪었다.


술을 싫어하게 되었다고 해도 인생에 크게 나쁠 것은 없었겠지만, 그래도 내가 여전히 좋은 사람들과의 술을 즐기는 사람으로 남은 것은 부모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로 주도를 가르쳐주시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은 나에게 술은 '즐기며' 마셔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아빠가 밖에서 지인들과 술을 드시고 연락도 제대로 없이 늦는 바람에 엄마가 속상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나의 부모님은 퍽 자주 둘이서 술을 드셨다. 대학 동창이자 업계 동료였던 두 분은 언제나 서로 이야기할 거리가 많았다. 엄마가 대충 말해도 아빠는 다 알아듣고 아빠가 대충 말해도 엄마는 다 알아듣는, 그렇게 끄덕끄덕 해가며 둘이 술을 드시는 게 참 좋아 보였다.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들 중에 전철역 앞 포장마차 트럭에 관한 기억이 있다. 매일은 아니고, 아마 요일이 정해져 있었겠지, 동네 어귀의 전철역 앞에 한 번 씩 오는 파란 트럭이 있었다. 트럭 앞에 의자 같은 것을 몇 개 차려 놓고 해삼, 멍게, 소라 따위와 소주를 팔았는데, 엄마 아빠랑 같이 거기 앉아 나는 멍게를 먹고 부모님은 소주를 마셨던 적이 있다. 늦은 시간에 잠을 자지 않고 밖에 있다는 흥분과 부드러운 밤바람도 좋았고, 누군가 해 준 “애가 멍게를 다 먹는다"는 칭찬 아닌 칭찬에 으쓱해졌던, 기분 좋은 밤이었다.


가끔은 나와 남동생을 데리고 동네 돼지갈비 집에서, 그 시절 유행하던 '양념통닭' 집에서 소주나 맥주를 같이 드시기도 했지만, 보통은 집에서 특별한 안주 없이 김이나 멸치에 맥주 한 잔이었다. 평소 반찬으로 준대도 별로 신나지 않는, 별것 없는 안주가 그렇게 맛있어 보이고, 맡아보면 냄새도 썩 좋지 않은 술이 그렇게 마셔보고 싶었던 것은, 두 분이 그걸 드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가 재미있고 좋아서였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은 무엇일까?

나는 '맘 편하게 먹는 술'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맞는 사람과 이야기 나누면서 적당히 먹는 술. 마시는 내내 긴장하지 않아도 되고, 억지로 마시지 않아도 되고, 술자리가 파한 후에 불편한 기분이 남지 않는 술. 그리고 나에게 그것은 집에서 남편과 마시는 술, '집술'이다. 주종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캔맥주가 제일 만만하지만 와인도 괜찮고, 가끔은 칵테일로 기분을 내보기도 한다.


남편과 나는 집 앞 치킨집이 혹시라도 망할까 봐 진심으로 걱정하며 자주 주문하고, 편의점에서 4캔에 1만 원 하는 캔맥주들을 쟁여두고 주말을 기다리곤 했다. 그런데 입에 맞는 치킨집도, 24시간 편의점도 없는 텍사스로 오게 되면서 한동안 '집술'을 하지 못했다.

텍사스에 우리보다 몇 년 먼저 온 어떤 분은 "한국만 한 데가 없다"라고 했다. 여기는 밤 10시가 넘으면 여는 술집도 거의 없고, 대중교통도 없는 데다 대리운전을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어찌 됐든 술을 깨고 운전을 해서 집에 와야 한다. ‘원하는 만큼' 마실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다. 가족들이 술을 좋아하지 않아 밖에서 지인들과 술을 드셔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 그분에게 이곳은 심심하고 지루한 도시였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 지내보니 우리 부부에게는 이곳 텍사스가 '집술'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남편과 나는 코*트코에서 장을 볼 때마다 맥주를 한 박스 씩 샀다. "이야, 우리 이제 술을 짝으로 사놓고 먹는 거야?"하고 키득거리면서. 한국에서는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일이었지만, 한 박스를 사다 놓아도 둘이서 한 캔 씩 홀짝대다 보면 금세 없어졌다. 그럼 다음번에 갔을 때는 다른 종류로 한 박스. 왜 집이 크고 팬트리가 두 칸이나 있는지 알게 되었다. 한 칸은 일반 식료품용, 한 칸은 술용인 것이다. 텍사스 사람들은 다들 이러고 사는 게 틀림없다!

동네 마트에 가면 6캔 단위로 포장된 맥주들도 있는데, 근처의 소규모 브루어리에서 만든 낯선 맥주도 많아 도전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 와인도 종류가 많고 저렴해서, $10 대 초반이면 꽤 괜찮은 와인을 고를 수 있었다. 사실 와인에 대해 잘 몰라서 나에게는 적당히 달달하기만 하면 좋은 와인이긴 하지만.

보통 한 박스의 맥주와 두세 병의 와인이 상비되어 있는 우리 집 팬트리. 재고가 좀 줄어든 상태이다. 채우러 가야겠군.
여행지에서 들른 브루어리에서 사 온 재료로 만든 칵테일

무엇보다도, 조금이나마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해졌다. 한국에서 일할 때보다 회식의 횟수도 줄어들었거니와, 늦도록 여는 가게가 없으니 회식을 하더라도 마치는 시간이 빨랐다. 한국 사람들은 이곳에서도 야근을 하고, 이곳에서도 가끔은 빡세게 술을 마셨지만(대체 어디서 그렇게 늦도록 영업하는 가게를 찾아내는지, 재주도 좋다.) 평균 귀가 시간은 훨씬 빨라졌다.

딱 하나 아쉬운 것은 한국 편의점의 다양한 안주들이었다. 치즈와 육포 종류는 여기도 다양했지만, 매운 새우과자라든가 어묵탕, 구울 수 있는 떡, 봉지를 뜯어 데우기만 하면 되는 달달한 달걀말이 같은 안주가 이따금 당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일부 안주를 잃고 술의 대량 구매와 넉넉한 시간을 얻었으니, 우리 부부에게는 퍽 남는 거래였다.



코로나의 시대가 되면서 우리 부부의 집술 생활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아이들은 우리가 냉장고에 넣어둔 종류별 맥주를 보고 "나도 딱 한 방울만 마셔보면 안 돼?"라고 묻고(안 된다, 이놈들아), “할아버지는 젓가락에 찍어서 한 방울 줬단 말이야.”하고 조르기도 하고(아, 아빠, 쫌!), 와인을 딸 때면 자청해서 웨이터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그래도 한 방울은 안 줄 거다, 흥.)


내가 어릴 적 본 부모님이 기분 좋게 술 한 잔을 나누던 모습을 기억하듯, 이 녀석들도 우리 부부의 ‘집술’을 기억하겠지. 언젠가 “엄마, 우리도 한 방울만!” 대신 “나도 한 잔 주세요.”하고 당당히 잔을 내미는 날도 오겠지.

살다 보면 업무 때문에, 혹은 쓰라린 어떤 일 때문에 술을 마시는 날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술은 좋은 사람과 맘 편히, 적당히 마시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주면 좋겠다. 그리고 술 그 자체보다는 소중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술을 곁들일 때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으로 자라주면 좋겠다.

내가 나의 부모님에게서 그렇게 배웠듯이.


... 훈훈하게 글을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어라, 잠깐만. 아빠? 나는 고3 백일주도 못 마시게 했으면서, 콩만 한 손주들한테는 술을 한 방울 씩 줬다고요? 먹어보고 싶다고 한다고? 와 진짜, 치사 뿡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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