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에 칼을 '사' 왔다
몰랐는데, 칼 종류는 선물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인연이 끊긴다나. 중국 사람들이 우산(傘)의 발음이 헤어진다는 뜻의 한자와 비슷하여 비즈니스 선물이나 행사 기념품으로 우산을 선물하는 것을 꺼린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도 인연이 끊긴다는 이유로 칼은 선물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퇴사를 앞두고, 환송 선물로 팀으로부터 뭘 받고 싶냐는 말에 나는 내 이름이 새겨진 일식도와 중식도를 갖고 싶다고 했다. 이름을 새기기까지 하기에는 내 출국 전 날짜도 모자라고 예산도 살짝 초과되어 일반 칼을 골라야 했지만. 여하튼, 그리하여 나는 그 두 자루의 칼을 나의 환송 회식 자리에서 우리 팀 막내에게 천 원을 주고 '샀다'. 그날, 회식 메뉴로는 소고기 구이를 먹었다.
소고기 구이는, 아마 다른 직장인들에게도 그러하겠지만, 나에게 ‘화려한 회식’의 상징이다. 뭔가가 잘 안되어서, 상사한테 깨져서 한 잔 '때리러' 가는 날이 아니라 예산을 좀 많이 써도 된다고 허락받은, 프로젝트가 끝났다거나 신입사원이 온다거나 하는 특별한 날의 회식.
나는 2006년부터 12년 정도 종로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요즘은 문화도 바뀌고 코로나로 회식도 감소했겠지만 “라떼는” 회식을 주 2회는 기본으로 했다. 잦은 회식에 짜증이 나다가도 메뉴가 소고기라 하면 흐음, 그래? 하고 다시 생각하게 되곤 했다. 정확히 세어본 적은 없지만 어림잡아 천 번은 했을 회식. 그중 가장 많이 먹은 건 역시 삼겹살에 소주 또는 소맥이었고, 장소가 종로인 만큼 유황오리집, 낙지볶음집, 순대국밥집도 흔해 많이 먹었다. 광화문 쪽에 세련된 음식점들이 많이 생기면서 멕시칸, 아메리칸 차이니즈, 중동 음식까지 회식에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역시 회식 메뉴 좀 골라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평범한 날은 삼겹살, 좀 특별한 날은 소고기였다. “오늘 메뉴는 소고기입니다.”하고 공지를 돌리면 “아 나 그거 못 먹는데.”하는 사람도 “아 그거 지겨운데”하는 사람도 없고, 그날 예산을 ‘쏘는’ 임원이나 팀장도 확실한 생색을 낼 수 있고 인기도가 올라가는, 안전한 메뉴.
나의 환송 회식 메뉴로 소고기 구이가 선택된 데에는 이러한 안전함 말고도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마지막으로 몸담았던 팀의 첫 회식 날, 나를 포함해 일곱 명이 회식을 했었다. 팀에 여자는 나뿐이었는데 그날 내 ‘먹포텐’이라는 것이 폭발해, 사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체격이 좋은 같은 팀 부장님보다도 내가 더 많이 먹었다. 나를 처음 보신 팀장님도 ‘얘 먹이려면 예산 깨나 들겠는데?’하고 속으로 놀라셨다고 한다.
그 후로 우리 팀 막내는 “과장님 안 계신 날 뫄뫄집(식당 이름) 갔었는데요, 그날보다 예산 반도 안 썼어요.”, “과장님 때문에 뫄뫄집 회원카드 만들어야겠어요, 만들면 할인해 준대요. 아 그날도 만들었으면 십만 원은 할인받는 건데.”하고 나를 간간히 놀려댔다. 그리고 환송 회식 메뉴는 꼭 집어 '뫄뫄집' 소고기 구이로 정해졌다.
옛날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금 감상적인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다. 음... 모르겠지만, 하겠다.
회사는 ‘일을 하고 급여를 받는 곳’ 일 수도 있고, ‘자아실현의 장’ 일 수도 있겠지만, 나처럼 뚜렷한 목표의식 없이 집안 사정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경제적 독립을 해야 했기에 입사 그 자체가 목적이었던 사람에게는 그 둘의 중간 어디쯤이었다. 그리고 또 나같이 센티멘털한 망상에 종종 빠지곤 하는 인간에게는 '내가 깨어있는 시간의 반 이상을 보내는 곳이자 10여 년 전부터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살아온 사람들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나는 우리 회사를 꽤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면, 회사의 동료들과 그들과 함께 먹는 밥과 그들과 함께 마시는 술자리와 휴게실의 잡담과 인생 상담을 좋아했다. 내 월급이 당장 느는 것도 아니건만 회사의 수익 개선을 위해 고민하는 회의석상에서 묘하게 불타오르는 정의감 같은 것, 시답잖은 농담이나 툴툴하게 뱉는 말 속에 느껴지는 배려심, 맛있는 메뉴나 재밌는 것을 발견하면 우리 팀원들에게 알려줘야겠다 생각하는 오지랖을 나는 참 좋아했다. 돌이켜보니 참 좋은 사람들과 생활을 했구나, 내가 복이 많았구나, 싶어 진다. 사내에서 부딪힌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좋은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지나고 나니 좋은 것 위주로 기억에 남았다.
삶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정말 알 수가 없는 일이구나, 싶다. 한 번쯤 해외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해 본 적은 있지만 그게 미국은 아니었고 전업주부로서의 나를 상상해 본 적도 없었는데, 나는 지금 미국에 사는 전업주부이다.
가족을 위해서 뿐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내린 결정이기도 했지만, 환송 회식 날 나는 소고기를 평소 뫄뫄집에서 먹던 양의 반도 먹지 못했다.
코로나로 많은 음식점들이 닫았던데, 종로 한 복판의 비싼 임대료를 견디고 뫄뫄집은 살아남았기를.
그리고 이 글을 빌려, 삶의 어느 지점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의 동료들이 다들 행복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한다. 요즘은 인터넷이며 전화며 워낙 좋은 세상이니까, 이따금 연락이 닿기도 바라본다.
나는 칼을 '선물 받은' 게 아니라 '샀으므로'.
후일담을 덧붙이자면, 그날 '사 온' 칼들은 기대 이상으로 매우 유용한 선물이 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요리할 일이 늘어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다 잘라지고 다듬어진 상태로 구매했던 식재료들을 내가 손질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줄은 몰랐는데, 통삼겹살이나 덩어리로 된 횟감을 사다 자르고, 오징어나 생선 내장도 직접 다듬어야 할 줄이야.
원래 가지고 있던 일반 부엌칼만으로는 아무래도 힘들었을 텐데, 날카로운 일식도와 무게감 있는 중식도는 오늘도 텍사스에서 나의 손목 건강과 삶의 질 향상, 그리고 집밥 메뉴 다양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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