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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Aug 31. 2021

수제 초콜릿

‘텍사스 스케일'로 만듭니다

큰아이는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에 태어났다. 당시 솔로였던 한 친구가 큰아이를 보고 "얘는 밸런타인데이에 뭐라도 반드시 받을 수 있겠네. 좋은 날 태어났구나."라고 아련하게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우리 가족은 큰아이가 만 세 살 때부터 매년, 큰아이의 생일에 다 같이 초콜릿을 만들어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대여섯 살 때 큰아이는 밸런타인데이가 되면 온 동네 슈퍼마켓, 제과점, 편의점마다 초콜릿을 파는 게 자기 생일이라서라고 생각했다. 둘째에게

"형아 생일은 되게 좋은 날이다? 우리 집에서 초콜릿도 만들지, 근데 가게에서도 초콜릿을 많이 팔아!"

라고 자랑하는 것을 듣고 아, 그러고 보니 '밸런타인데이'라는 것을 아이에게 설명해 준 적이 없구나, 하고 깨달았다. 뭐 굳이 지금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온 세상이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환영해준다는 기분을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어차피 곧 알게 될 테지만, 싶어 그냥 두었다.

여하튼 큰아이는 초콜릿이 자기 생일을 기념하는 특별한 음식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라는 것은 다분히 핑계이고 그냥 맛있어서이겠지만, 초콜릿을 매우 좋아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10년 가까이, 이곳에 와서도 초콜릿 만들기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에서 2월 14일은 학년이 끝날 즈음이어서, 우리 가족이 만든 초콜릿은 친한 친구네 두 세 집과 나누어 먹는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 오니, 아예 학교에서 2월 14일은 Friendship Day라고 해서 반 전체가 작은 선물이나 간식을 나누는 것이었다. 대부분 연필 한 자루라든가 귀여운 스티커, 소포장된 사탕이나 과자류를 가져온다고 하는데, 우리는 어차피 초콜릿을 만드니까 그걸 좀 넉넉하게 만들어서 학교에 가져가기로 했다.

두 아이의 반 친구들 모두와 이웃들에게도 나눠주려니, 초콜릿이 4 파운드는 있어야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마트에 초콜릿 케이크나 머핀에 사용하는 베이킹용 초콜릿은 많이 팔던데 그걸 녹여서 틀에 부을 수 있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어서, 매년 사용하던 칼리바우트(Callebaut) 커버춰 초콜릿을 아*존으로 주문했다. 며칠 후, 배송이 온 봉투를 집어 드니 묵직했다.


한국에서는 초콜릿 안에 아몬드를 넣기도 하고 땅콩가루를 뿌리기도 했지만, 여기서는 학교에 먹을 것을 보낼 때 특히 넛(Nut) 류는 함부로 사용할 수 없도록 되어있어 그냥 초콜릿만 녹여서 틀에 부어 만들었다. 한국에서 만들던 것보다 과정은 단순해졌는데도, 분량이 두 배가 넘으니 시간이 꽤 걸렸다.

짤주머니 또는 지퍼락에 초콜릿 알갱이들을 넣고, 미지근한 물에 담가 중탕으로 녹인다. 초콜릿 전용 중탕기도 한 대 있지만, 짤주머니나 지퍼락을 사용하는 것이 어린이들이 짜기에 편리하다.

사실 비닐 안으로 물이 들어가지 않게 중탕만 잘하면, 초콜릿 만들기는 딱히 어려울 것이 없다. 결국 내가 하는 것은 초콜릿의 모양을 알갱이 모양에서 세모, 하트, 별로 바꾸기만 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뭐 어떤가, 즐겁고 맛있으면 그만이지.

우리집 초코 중탕기. 장난감처럼 생겼지만 8년 넘게 잘 작동하고 있다.

초콜릿을 만들면서 아이들이 가장 좋아한 것은, 매년 그렇듯이 마지막에 짤주머니를 알뜰하게 핥아먹는 것이었다. 중간중간 '실수로' 망친 초콜릿이나 흘린 초콜릿을 '어쩔 수 없이' 퍼먹기도 했지만.

매년 만들어 주변과 나누어 먹은 초콜릿들



'이젠 좀 컸다고 이런 거 식상해한다거나 귀찮아하지 않을까?'

초콜릿 재료를 주문할 때 슬슬 이런 고민이 살짝 들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올 2월까지는 두 아이가 서로 초코를 녹여보겠다, 밖에 흘린 건 먹어도 되느냐, 이건 내가 흘린 거다,... 등등 쟁탈전이 벌어져서 안심(?)했더랬다. 사춘기 소년의 티가 나기 시작한 큰아이가 내년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가능한 한 오래오래 우리 가족의 이 작은 전통을 유지하고 싶다.


아, 더 이상 '작은' 전통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한국에 있을 때는 기껏해야 500g~1kg의 초콜릿을 사용했는데. 이곳에서의 첫 밸런타인데이에 4 파운드를 주문해서 여기저기 나누고 나니 우리 아이들이 쟁여놓고 먹을 것이 모자라서 입이 댓 발 나왔었기에, 그다음 해에는 4.5 파운드, 올해는 5 파운드로 주문량을 늘렸다. 내년 2월에도 아마 5 파운드는 필요하지 않을까.


'텍사스 사이즈(Texas-sized)'라는 표현이 있다. 텍사스가 미국 본토에 있는 모든 주들 가운데 압도적으로 면적이 넓다 보니, 무엇인가가 몹시 클 때 약간 농담을 섞어 그렇게 말한다. "Everything is big in Texas."라고 하기도 한다. 스테이크도, 아이스크림도, 자동차도, 심지어 벌레들까지도, 다 텍사스에 오면 커진다고.

우리 가족의 전통도 여기 와서 '텍사스 스케일'로 커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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