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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Aug 05. 2021

버터크림 케이크 예찬

그 많던 버터크림 케이크는 다 어디로 갔을까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에는 '고려 제과'라는 빵집이 있었다. 바삭하고 달달한 껍데기부터 다 뜯어먹곤 했던 소보로빵, 두 가지 종류의 크림빵(둥근 삼각형 모양 안에 레몬색의 크림이 들어있는 것과 길쭉한 모양에 하얀 크림이 들어있는 것), 가운데가 쏙 들어간 팥빵, 다른 빵들의 세 배쯤 되는 큰 사이즈에 둥글넓적하고 안에 딸기잼이 샌드 되어 있던 맘모스빵, 위가 네모난 우유식빵과 위가 조금 둥근 모양의 옥수수 식빵 등을 팔았고, 앞을 지나갈 때면 언제나 빵 냄새가 나서 행복해지던 곳이었다.

‘국민학교' 시절 나와 남동생은 일주일에 오백 원에서 천 원 정도의 용돈을 받았는데, 그때 고려 제과에서 팔던 팥빙수가 천오백 원이었다. 여름이면 가끔 둘이 용돈을 모아 팥빙수를 사 먹었다. 요즘 빙수처럼 보드랍고 세련된 맛의 우유 얼음이 아닌 일반 얼음에 단팥, 연유, 딸기 시럽, 콘플레이크, 젤리, 조그만 떡, 시럽에 절인 체리가 얹어지고 우유가 부어져 나오는 스타일이었는데, 어린이 둘이 충분히 먹을 만큼 양도 많았고 정말 맛있었다. 둘이서 빙수를 먹고 계산을 하고 나올 때면 조금은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생일 같은 특별한 날에는 케이크를 샀는데, 다양한 케이크가 있었겠지만 기억에 남는 건 달디 단 하얀 크림으로 만들어진 밧줄 같은 무늬 사이사이에 얹어진 무궁화 비슷한(아마 장미였겠지만 무궁화처럼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과 잎이 장식된 것이었다. 엄마 말로는 꽃과 잎이 설탕으로 만들어졌다는데도 이상하게 조금 씁쓸한 맛도 느껴지고 별로였는데, 크림은 정말 맛있었다. 그게 '버터크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우리 가족은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고, 고등학교 생활로 한동안 직접 빵집에 갈 일이 거의 없다가 어느 순간 주변을 보니, 빠*바게트나 뚜*쥬르 같은 프랜차이즈가 아닌 빵집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내가 그렇게 좋아해 마지않던 종류의 케이크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단단한 크림으로 만들어진 이런저런 무늬나 장식 대신 부드러운 ‘생크림'과 과일이 잔뜩 얹어진 케이크가 대한민국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나는 '크림이 예전하고는 다른데, 요즘은 그런 케이크는 아무도 안 만드나?’ 정도로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미국에 온 후, 우리 가족 행사 중 첫 번째로 돌아온 것은 내 생일이었다. 동네 마트 제과 코너에서 적당히 케이크를 골라 왔는데, 먹어보니 오 이것은! 어려서 먹던, 이십 년 가까이 못 먹어 본 그 크림의 맛이 나는 게 아닌가! 생크림보다 많이 달고, 조금 더 단단하고, 그래서 차갑게 먹으면 정말 맛있었던 그 크림이 거의 0.5 센티미터는 되는 두께로 시트지를 감싸고 있었다. 케이크 위의 장식도 모두 그 크림으로 만들어졌고! 너무 반가운 나머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체중 관리 따위는 잠시 잊고 와구와구 크림을 먹었다.

알고 보니 미국의 케이크는 대부분 이 버터크림 케이크였다. 내가 지구는 이제 생크림이 정복했나 봐, 하고 생각했던 지난 이십 년 동안, 미국인들은 변함없이 버터크림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어쩐지 내 말투에서 억울함이 느껴진다고? 맞다. 아주 조금, 배가 아팠다.) 생크림보다 잘 무너지지 않아 케이크 장식하기가 쉬워서 홈베이킹에도 더 알맞고 유통이나 보관도 더 유리한 버터크림은 당연히 모든 나라의 제과업계에서 퇴출된 것이 아니었다. 생크림이 은은한 단맛을 선호하는 한국인의 입맛에 더 잘 맞아 한국의 제과업계에서만 퇴출되다시피 했나 보다(라고 제과업에 종사하는 지인이 말해주었다).

다행히 아이들도 버터크림 케이크를 꽤 좋아한다

우리 동네 한인마트에도 한국 프랜차이즈 제과점이 입점해있어 생크림 케이크가 있지만,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주로 거기에서 케이크를 사는 모양이지만, 나는 여기 사는 동안 버터크림 케이크를 한 번이라도 더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낭비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이들의 생일과 크리스마스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케이크를 고를 테지만, 내 생일, 남편 생일, 결혼기념일은 내 맘대로 케이크를 결정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버터크림 케이크는 집 근처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고 가격도 생크림 케이크보다 저렴하니, 나로서는 일석다조(一石多鳥) 셈이다.


버터크림은 꽤 달고 느끼해서 작은 사이즈의 케이크를 사도 한 번에 다 먹기에는 어려운 경우가 많다. 나는 남은 케이크를 소분해 밀폐용기에 넣어 냉동해 두고 “이건 엄마 비상용이니까 혹시 먹고 싶다면 엄마한테 먼저 물어봐줘.”라고 아이들에게 말해둔다. 그러면 큰돈은 아니지만 약간의 비상금을 쟁여둔 것처럼 든든한 기분이 든다. 우울한 날을 위한 비상 케이크랄까. (솔직히 말하면, 우리 가족은 8인치 케이크면 충분하지만, 맘에 드는 디자인이 없다는 핑계로 10인치나 13인치 케이크를 사서 일부러 좀 쟁여두기도 한다.)

비상용 케이크



이 글을 쓰다 보니 다시 한번 문득 궁금해졌다.

아무리 생크림 케이크의 은은한 단맛과 부드러운 식감이 대중적인 입맛에 더 잘 맞는다 한들, 그렇게까지 싹, 전부, 모조리, 다, 한꺼번에 생크림 케이크로 바꿀 일이었을까? 제과 프랜차이즈 회사에서도 회의를 했을 텐데, 나처럼 버터크림 케이크를 좋아하는 고객도 있다는 걸 몰랐을까? 그 많던 버터크림 케이크는 다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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