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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Aug 14. 2021

굴 숯불구이(Chargrilled Oyster)

큰아이를 웃게 하는 음식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있었던 팀에는 남자 후배가 셋 있었다. 나이가 나보다 두 살에서 열두 살 아래인 친구들이었는데, 가끔 내가 아들내미들의 어떤 행동에 대해 푸념을 하면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에서 우러난, 아들의 입장에서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었다.

"ㅇㅇ이가 한 중학생쯤 되잖아요? 그럼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갈 때가 있을 거거든요. 근데 그거 꼭 화나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저도 잘못한 거 알고 '아 엄마한테 혼나겠다'하고 쫄아요."

"그럴 땐 괜히 말 걸고 그러지 마세요. 과장님 속만 상해요. 그냥 고기 구우세요, 시즈닝(seasoning) 엄청 때려 부어서. 아님 치킨을 시키세요. 뭐가 됐든 맛있는 냄새를 막 풍기세요. 그럼 알아서 나와요."

그때는 아직 큰애가 겨우 초등학교 2학년 정도였던 때라, 우리 집 애들은 지금 장난감 사 달라고 삐친 거라고, 너무 앞선 조언이지만 기억해 두겠다고 대답하며 웃어넘겼었다.



루이지애나 주의 뉴올리언스로 가족 여행을 갔을 때였다. 먼저 출장으로 한두 번 뉴올리언스에 와 본 적이 있던 남편이 여기는 차그릴드 오이스터(Chargrilled Oyster, 굴 숯불구이)가 유명하다며 'Felix'라는 이름의 식당으로 우리 가족을 이끌었다. 코로나 전이라 길에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예약을 받지 않는 식당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자고로 굴이라 함은 생으로 또는 직화구이로 초장이나 레몬즙만 살짝 뿌려 본래의 향을 느끼며 먹어야 하는 음식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던 나였기에 ‘치즈를 뿌렸다니 맛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진정한(!) 굴 맛은 아니지 않을까.'하고 추측하고 있었다. 길게 늘어선 줄과 가게 밖까지 새어 나오는 굴 굽는 연기에 호기심이 일기도 했지만, 아주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차그릴드 오이스터는 단순하게 치즈 맛으로 범벅이 된, 굴 향을 죽여버린 요리가 아니었다.

치즈를 뿌렸지만 은은하게 굴 향이 살아있었고 숯불의 향기까지 더해져 생굴을 먹을 때보다 향이 오히려 풍요로운 느낌이었다. 보기에 더 호화로워 보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시금치, 베이컨, 게살 같은 다양한 토핑이 올라간 것도 있어 굴만 있는 것보다 양도 푸짐했다. 굴 본래의 향이 너무 강하면 싫어하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이건 누구라도 좋아할 만한 요리이겠다 싶었다.

다양한 토핑의 차그릴드 오이스터

사람 많고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뉴올리언스에 도착한 직후부터 부루퉁한 표정을 하고 있던 큰아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맛있는 굴은 처음 먹어본다는 것이었다. 하루 중 최고로 신난 표정으로 웃는 큰아이를 보며 아무리 그래도 음식 하나에 저렇게까지 기뻐하다니, 내 아들 맞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두 더즌(Dozen)을 주문하면서 이게 그래도 애피타이저에 속하는 메뉴인데 좀 많나, 했었는데 더 주문하지 않은 것을 즉각 후회했다. 추가 주문을 하면 30분 이상 걸린다고 해서 이미 주문한 메인 메뉴를 먹고 아쉬운 마음으로 식당을 나왔다.

다음날은 Felix 맞은편에 있는, 차그릴드 오이스터에 있어 쌍벽을 이룬다는 Acme라는 음식점으로 갔다. 우리는 학습 능력이 있으니까, 3 더즌을 주문했다.

그 외에도 붉은 강낭콩과 쌀을 향신료와 함께 끓인 레드빈 앤 라이스, 소시지와 새우가 들어간 걸쭉한 스튜 검보 등 루이지애나에서 먹은 모든 요리들이 맛있었지만, 차그릴드 오이스터는 정말 최고의 음식이었다. 대체 이게 왜 메인 메뉴가 아니라 애피타이저로 분류되는 것인지 이해할  없을 정도로. 다른 사람들은 이걸  더즌이나  더즌만 '가볍게' 먹고 멈출  있단 말이야?


다행히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도 차그릴드 오이스터를 비롯한 루이지애나 음식을 파는 음식점이 있어 가끔 간다. (정말 다행이다. 그 음식점이 없었다면 나는 차그릴드 오이스터를 해 먹기 위해 온갖 도구와 양념들을 샀을 것이다.) 가면 우리 가족은 애피타이저 코너에 있는 각종 차그릴드 오이스터만 두 세 더즌을 주문한다. 애피타이저를 메인 메뉴 양만큼 주문하는 셈이다. 큰아이 혼자서도 열 개쯤은 거뜬하기 때문에 다른 가족들이 맛이라도 보려면 그 정도는 주문해 줘야 한다.



반년 정도 전부터 큰아이는 슬슬 ' ' 접어드는 티가 나기 시작했다. 여기 나이로 열두 . 아직 틴에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린이도 아닌 열한 살과 열두  아이들을 여기서는 사이에(Between)  나이라고 해서 트윈(Tween)이라고들 부른다. 틴에이저의  단계인 트윈 노릇을 우리 큰아이도 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모든 것에 No부터 하기, 짜증 내기, 동생에게 시비 걸기 등등.  아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즉흥적이고 감정 표현이 격한 편인 둘째에 비해 성실하고 감정 기복이 적어서 그간 크게 속상하게 하는 일이 없었던 아이라 더욱 적응이  되고  속이 뒤집어진다. 무슨 말을 해도 시큰둥, 어지간해서는  웃지도 않고  끝마다 어깃장을 놓더니, 참다못한 내가 화를 버럭 하면 금세 풀이 죽고 미안하다고 한다.

'아니, 미안한 거 아는 놈이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밥 먹으라는 말만 잘 들어, 아주.'

속으로 식식대다가, 예전에 회사 후배들이 해 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그거 꼭 화나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저도 잘못한 거 알고 쫄아요."

"그냥 맛있는 냄새를 막 풍기세요. 그럼 알아서 나와요."

아, 그러고 보니 소고기 미역국을 끓이는 냄새나 짜장을 만드는 냄새가 나면 좀 고분고분해졌던 것 같기도 하다.


조만간 그 루이지애나 음식점에 가야겠다. 맛있는 향 듬뿍 풍기는 차그릴드 오이스터도 먹고, 큰아이의 환하게 웃는 표정도 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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