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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Aug 24. 2021

아빠의 스테이크

조금 덜 특별해지기를

아이들이 텍사스에 와서 학교 다음으로 등록한 것은 태권도장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직전, 큰아이는 2단, 작은아이는 1단이 이제 막 된 참이라 아이들의 태권도를 향한 열정이 하늘을 찌를 때였다. 익숙한 태권도를 통해 놀면서 영어를 배우면 아이들의 적응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근처 도장에 등록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이 도장 학부모들 사이에서 텍사스 살이 선배이자 육아 선배이신 한국 언니들을 몇 분 만나게 되었다.

지금도 종종 만나는 그 언니들은 때로는 웃프고, 때로는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시는데, 초반에 해 주신 이야기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하나가 이거였다.

"여기 있을 때 애들 소고기, 달걀, 우유 많이 먹여. 특히 소고기. 앤지 씨, 아들만 둘이지? 이제 쫌만 커 봐, 소처럼 먹어대는 아들놈들 한국에서 소고기 원 없이 먹이려면 허리 부러지는데 여기서는 허리 부러지지는 않고 살짝 휘는 선에서 먹일 수 있어. 하하하."


맞는 말씀이었다. 마트에서 장을 보다 보면 자주 느끼는 것이 물가가 싸다는 것이었다. 텍사스는 미국에서도 생활물가가 안정적인 편이라고 한다. 우리 가족이 주로 장을 보는 코*트코 기준으로 달걀은 24개에 $4 정도이고, 유기농 우유도 하프갤런(약 2L)에 $3~4, 초이스 등급의 구이용 소고기는 1 파운드(약 450 그램)에 $20~30 한다.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100 그램에 만 원을 채 하지 않는 셈이다. 그 외에 수박은 들기에 버거울 정도로 큰 것을 $5 내외면 충분히 살 수 있고, 생수도 500ml 40병에 $3, 아이들 간식으로 들려 보내곤 하는 소포장 쿠키류도 12팩 세트에 $5를 넘기지 않는 게 보통이다.

한국에서 주말마다 이*트에서 장을 보면, 그때는 우리 아이들이 더 어릴 때였는데도 20만 원 정도는 나오곤 했었다. 품목이 달라졌으니 단순 비교는 옳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어지간해서는 한 번 장보기에 $150를 넘기는 일이 없다.


여하튼, 육아 선배님들의 충고를 따라, 집에서 소고기를 종종 굽는다. 아무 날도 아닌 날은 그냥 적당한 두께로 썰어 프라이팬에 구워 소금이나 소스를 찍어 먹고, 조금 특별한 날은 스테이크로.

날씨가 좋은 날은 뒷마당에서 구워 먹기도 한다.

조금 특별한 날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 제목은 붙이기 나름이다. 누군가의 생일, 크리스마스뿐 아니라 미국 독립기념일, 노동절, 아이들이 태권도 승급 심사에 통과한 날, 학교에서 '칭찬 쪽지'를 받아온 다음 날, 여름방학 첫날, 개학 하루 전,... 아무튼 아무렇게나 붙이는데, 이 날들의 공통점은 '남편이 시간이 여유로운 날'이라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스테이크는 '아빠의 요리'이고, 남편의 스테이크는 과정이 제법 까다로워 시간이 조금 걸리기 때문이다.



텍사스에 온 후, 남편은 스테이크는 집에서 해먹을 줄 알아야 하지 않겠냐며 고기 내부 온도를 재는 온도계까지 장만하고 만족스러운 스테이크를 굽기 위해 정진했지만 초반 성공률은 대충 반이 좀 넘는 수준이었다. 실패할 때면 남편은 고기 탓 혹은 장비 탓을 했고, 나는 속으로 '뭐든지 자주 해야 늘지. 어쩌다 한 번 씩 하는 요리가 늘 턱이 있나.' 싶었지만 정성을 생각해 매번 맛있게 먹었고, 아이들은 냉정하게 "오늘은 별로." 혹은 "이번은 맛있네."하고 평가를 날렸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남편의 요리에 대해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요리는 일종의 '종합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조리 과정만이 요리가 아니라 메뉴 선정, 재료 구입, 재료의 재고 관리, 대략적인 뒷정리까지가 요리인 것이다. 예를 들어, 며칠 내로 먹어야 하는 무가 있다고 하자. 무를 활용해 오징어 뭇국을 끓이기로 하고 오징어를 사 온다. 다진 마늘, 대파, 국간장 등 부재료의 재고도 확인해보니 대파가 다 떨어져서 함께 산다. 오징어 뭇국을 끓이고, 남은 대파는 깨끗이 다듬어서 지퍼락에 넣어 얼려 둔다-까지가 요리인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 생각하는 요리는 좀 다른 모양이다. 이따금 남편은 요리 담당을 자청하고 고기를 굽는데, 정말 고기만 굽는다. 곁들일 쌈채소와 된장국, 또는 매시드 포테이토와 샐러드 준비까지 고기구이 요리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내가 지나친 것인가. 게다가 매일도 아니고 어쩌다 한 번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한 상 차려내면 안 되겠니.


여하튼, 어느 날 남편은 '리버스 시어링(Reverse searing)'이라는 것을 들었다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고기에 시즈닝을 넉넉히 뿌려 잠시 두었다가 화씨 200도 정도로 예열한 오븐에서 먼저 굽는다. 고기 내부의 온도가 화씨 115도 정도가 되면 꺼내서, 올리브 오일을 두른 주물 팬에 2차로 구워 준다.

전에는 팬으로 두꺼운 스테이크를 속까지 잘 익히려다 너무 오래 구워 질겨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븐에서 내부를 먼저 익히고 겉을 구워주는 방식으로 하니 맛있는 미디엄 레어 스테이크의 성공률이 90% 이상으로 획기적으로 올라갔다.

남편이 구운 스테이크들 (물론 가니쉬는 내가 준비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아이들은 아빠의 스테이크를 매우 좋아한다. 프라이팬에 구워주는 고기도 물론 좋아하지만, 스테이크는 아무래도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무슨 날인지 모르겠는데 스테이크를 굽는 낌새가 느껴지면 "오늘 무슨 날이야?"하고 설레어하기도 한다. (응, 아빠가 엄청 일찍 퇴근했는데 집 냉장고에 고기가 있는 날.)

이제 한창 먹을 나이라 어지간한 고깃집에는 데리고 가기가 무서울 정도인 큰아이를 위해서도, 고기가 조금만 질겨도 잘 못 먹고 뱉어버리는 작은아이를 위해서도, 술 한 잔 곁들이고 싶어도 운전해서 돌아올 걱정에 그럴 수 없는 어른들을 위해서도, '아빠 스테이크 하우스'는 최고의 선택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 오픈일이 너무 적다는 점. 오픈일이 불규칙한 건 그렇다고 쳐도 자주 오픈해 주면 좋으련만, 한 달에 한 번 또는 잘해야 두 달에 세 번 꼴이라니. 텍사스니까 원재료 수급 비용이 문제는 아니고 결국 주방장의 일정 때문인데, 이렇게 가끔 여는 '신비주의' 전략 레스토랑이라니 단골 고객으로서 영 힘들다. 


아빠의 스테이크가 특별해서 좋긴 하지만, 조금만 덜 특별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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