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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Aug 30. 2021

뒷마당 삼겹살

한국인은 삼겹살심

얼마 전 넷*릭스에서 본 <삼겹살 랩소디>라는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지난 2016년 우리나라 연간 농축수산물 생산액 1위 품목이 쌀에서 돼지고기가 되었는데, 이는 삼겹살 때문이라고 한다. 프로그램에 출연한 문정훈 서울대 교수는 "이제 세계지도에 그 나라의 주식을 표시한다면, 우리나라는 쌀로 표시해야 하나, 삼겹살로 표시해야 하나 고민해야 한다”라고 웃으며 말한다. 자체 생산한 삼겹살로는 모자라 수입도 많이 하는데, 이를 두고 박찬일 셰프는 “한국이 전 세계 삼겹살을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라고, 한국에서 전 세계 삼겹살들의 월드컵이 열리는 셈이라고 표현한다.

아기부터 노인까지 인구 1인당 연평균 24kg 이상, 성인은 평균 4일에 한 번 삼겹살을 먹는다는 통계도 있다고 하니 한국인이 삼겹살을 많이 먹긴 하나보다.

흔히들 "한국인은 밥심"이라고 하는데, 이 정도면 "한국인은 삼겹살심"이라는 말도 성립할 것 같다.



텍사스행이 결정되고 난 후, 엄마와 어머니는 우리 가족이 '무엇을 먹고살지'에 대한 걱정을 가장 많이 하셨다. 한국 식재료를 많이 팔까? 미국인데, 뭐든지 더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한식 식재료는 없지 않을까? 김치는 있을까? 나물이나 젓갈 같은 게 있을까? 등등. 하지만 엄마도 어머니도 '고기'에 대해서는 걱정하시지 않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고기만큼은 미국이 더 싸고 많을 거라고 생각하셨고 그 예상은 거의 맞았다-삼겹살만 빼고.


나는 미국에도 삼겹살이 흔하게 있을 줄 알았다. 아니, 있을지 없을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맞겠다. 삼겹살을 얇게 썬 것이 베이컨 아닌가? 세상에 삼겹살이 없을 리가.

그런데 우리가 텍사스에 온 지 몇 달 정도 된 어느 날, 루이지애나에 사는 분이 우리 집에 놀러 오시게 되었다. 함께 코*트코에 갔다가 매대에 'Pork belly', 그러니까 삼겹살이 있는 것을 보신 그분이 "이야, 여기는 한국인이 좀 사나 보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분이 사시는 동네 코*트코에서는 삼겹살을 팔지 않는단다. 나는 모든 지점에 같은 상품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학생 1,200여 명 중에 한국인은 10명 남짓이지만, 그래도 이 코*트코의 상권으로 보면 한국인이 꽤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코*트코에서는 이렇게 통삽겹살을 판다. 포장 단위는 보통 5~6kg

삼겹살은 '한식' 식재료였구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은 운이 좋은 것이었구나. 새삼,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웹툰 작가, 루나파크님의 작품 한 장면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이곳은 나의 세력권이다'라는 의미로 단체는 깃발을 꽂고,
개인은 칫솔을 꽂는다.
- <루나파크> p.116

몇 달 전, 코*트코가 아닌 우리 동네 마트에서도 Pork belly를 발견했을 때, 이 이야기가 퍼뜩 떠올랐다. 우리 동네도 한국인의 수가 늘고 있거나, 삼겹살 맛의 매력에 이 동네 사람들도 빠져들고 있는 게 틀림없다. 한국인은 그 세력권에 삼겹살을 전파시킨다.



우리 가족은 텍사스에 온 후로 오히려 한국에서보다 삼겹살을 더 자주 먹는다. 코*트코 삼겹살의 포장 단위가 워낙 커서 한 번 사면 최소 세 번은 먹어야 하는 분량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뒷마당의 존재 덕이 크다.

삼겹살은 수육으로 먹어도 좋고, 에어프라이어에 구운 것도 맛있지만, '진리'는 역시 팬 위에서 김치와 함께 구워 먹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먹으려면 가스레인지 근처뿐 아니라 온 집안에 기름이 튀는 것을 감수해야 하는지라 한국에서는 그렇게 자주 먹지는 못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여기저기 불판이 지글지글하는 식당에도 자주 가기 힘들었고. 하지면 여기서는 뒷마당이 있으니까, 날씨만 좋으면 뒷마당에 테이블을 펴고 '부루스타'를 꺼내기만 하면 된다.


이 '뒷마당 삼겹살'이 그 진가를 가장 크게 발휘한 것은 지난 2020년 봄이었다.

우리 동네에는 그때 코로나로 인해 약 한 달 동안 스테이 홈 오더(Stay-home order)가 떨어졌었다. 등교 전면 금지, 식료품 구입 같은 필수 사유를 제외한 외출 불가, 다른 가구 구성원과의 접촉 금지, 모든 식당은 테이크아웃 판매만 허용.

비슷한 시기, 스페인은 락다운을 아주 엄격하게 해서 마드리드에 사는 내 친구는 며칠 동안 신발을 신어보지도 못했다는데, 여기는 동네 산책 정도는 할 수 있긴 했지만 그래도 갑갑했다.

아쉬운 대로 자주 뒷마당으로 나갔다. 텐트를 펼쳐 놓고 놀기도 했고, 캠핑용 의자에 그냥 앉아있기도 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더위가 조금 사그라들면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그리 넓지 않은 뒷마당이지만 스테이 홈 오더를 지키면서도 트인 공간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소박한 행복이었고, 운동량이 줄어들어 입맛이 떨어졌다가도 삼겹살 굽는 냄새에 식욕이 다시 돋았다. 김치도 곁들여 굽고 마지막은 밥 한술이나 라면으로 마무리하는 이 ‘한국인의 풀코스’를 먹어주면, 집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MT나 캠핑이라도 온 듯한 기분이 났다.



우리 가족은 여전히 종종 뒷마당에서 삼겹살 구이를 즐긴다.

마트에 가면 아무래도 미국 사람들이 즐겨 먹는 소고기나 닭고기가 매대의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점령하고 있고, 특히 한국보다 저렴한 소고기가 유혹(?)할 때도 있지만, '맛으로는 돼지고기지!' 하는 생각이 드는 우리 가족은 역시 삼겹살의 민족인 모양이다.


한국에 있을 때, 원래 비 오는 날은 소주에 삼겹살이 제격이었고,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면 삼겹살 기름으로 몸속 먼지를 씻어줘야 하는 것이 소위 ‘국룰’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요즘은 코로나 예방접종 전후에 기력 보충을 위해서도 삼겹살을 먹어야 한다고 들었다. 우리 가족은 '뒷마당 삼겹살'로 락다운을 이기는 힘까지 얻었으니, 역시 "한국인은 삼겹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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