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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Aug 10. 2021

새우부추전

프롬 더 스크래치(From the scratch), 텍사스 생활의 상징

텍사스에 온 한국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구동성으로 "아빠가 할 일이 많아진다"라고 하신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관리사무소'가 있는 아파트 생활을 하다 보니 집을 직접 수리하는 일이 드문 데다, 가전제품이나 가구의 무상 A/S가 워낙 잘 되어 있어 직접 그런 것들을 고치는 일도 거의 없었을 테지만, 여기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단독주택에 살아 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정말 끊임없이 수리하고 보수할 일이 생긴다. 집이란 참 이상하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비어있어도, 사람이 살고 있어도 문제가 계속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배관공이나 가전제품 수리공을 한 번 부르기만 해도 몇십 달러에서 백 달러쯤은 그냥 나간다. 그래서 어지간한 잔 고장은 직접들 고치는데, 다행인 것은 유*브를 찾아보면 안 나오는 수리 방법이 거의 없어 초보자도 비교적 쉽게 따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곳의 집들에는 마당에 잔디가 깔려 있다. 서부 개척 시대에 미국인들은 "이곳까지는 인간이 점령했다. 인간의 손길이 닿았다."는 의미로 진출한 곳까지 잔디를 심었다고 한다. 참으로 극단적인 품종 선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잔디는 인간의 손길이 '닿는' 정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필요한' 식물이기 때문이다. 주기적으로 물을 주지 않으면 금세 누렇게 마르고, 잠시만 깎아주지 않으면 엄청나게 자란다. 눌리거나 밟혀도 잘 자라는 생명력도 가지고 있지만, '관리'를 하느냐와 안 하느냐가 엄청나게 눈에 띄는 식물인 것이다. HOA(Home Owners Association, 우리말로 주민 자치회 정도 될 것 같다)에서 잔디가 엉망이어서 마을 미관을 해치는 집에는 경고 이메일을 보내기도 하니, 관리는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 할 자신이 없어 잔디 관리 업체를 고용했지만, 주말이면 직접 자기 집 잔디를 깎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집들이 아주 흔하다.

엄마들이야 한국에서나 여기서나 독박 가사에 독박 육아를 하는 것에 별반 차이가 없다고들 하지만(웃픈 현실이다), 아빠들은 한국에서는 외주에 맡겼던 집, 가전, 가구 수리에 때로는 잔디 관리까지 직접 해야 하니 한국에서보다 일이 늘어난다고 느끼는 게 보통이라고 했다.



우리 가족도 한국에 있을 때보다 많은 것들을 가정 내에서 해결하게 되었다.

외식이 거의 없어지고 내가 주식과 간식, 때로는 디저트류까지 만들게 된 것은 물론, 자잘한 가전의 고장은 주로 남편이 유*브를 보고 고치게 되었다. 내 새치도 집에서 염색하고, 아이들의 이발도 집에서 한다.

처음에 이곳 아이들, 특히 남자아이들의 머리는 부모가 다듬어주는 집이 대부분이길래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경험 삼아 아이들을 데리고 미용실에 두어 번 가 보았는데, 비용이 저렴한 편도 아닌 데다 가면 “몇 호로 해드릴까요?”라고 묻고 그 호수의 '바리깡'으로 머리카락을 밀어주는 게 전부이다시피 했다. 아, 이래서 그냥 집에서 애들 머리를 해주는 부모들이 그렇게 많았구나. 더구나 둥그런 두상과 뻣뻣한 머리카락을 가진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 스타일이 잘 어울리지 않았다.

큰아이는 두 돌 정도까지 미용실에만 가면 대성통곡을 했다. 뽀*로 비디오를 틀어줘도 내가 품에 안고 미용실 의자에 앉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집에서 머리를 다듬어 주느라 샀던 미용 가위를 다시 꺼냈다. 코*트코에서 바리깡도 샀다. '아빠 미용실'이 십 년 정도만에 다시, 조금 더 본격적인 버전으로 개장했다.

큰아이 아기 때 샀던 미용 가위를 이렇게 유용하게 다시 쓸 줄은 몰랐다.


여기에 우리 부부는 한 가지 더 새로운 일에 도전했다. 채소 키우기.

한인마트는 멀고, 가도 깻잎이랑 부추는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고, 대파와 상추는 또 왜 그리 비싼지. 몇몇 알고 지내는 한인 분들께 여쭈어보니 직접 심어서 가꾸어 드시는 경우가 꽤 있길래 우리도 한 번 심어보기로 했다. “그냥 심어놓고 물만 적당히 잘 주면 돼. 키우는 거 하나도 안 어려워.”라고들 하셨던 것이다.

한인마트에서 상추, 깻잎, 애호박, 그리고 부추, 이렇게 네 가지 씨앗을 사 와 심었다. 대파는 씨앗을 심을 필요 없이 먹고 남은 하얀 뿌리 부분을 흙에 꽂아주면 자란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

‘한인마트에서 사 온 씨앗과 대파로 한인마트 채소 코너의 매출을 줄이게 될 텐데 어쩐지 미안하네… 아니 그런데 씨앗은 왜 파는 걸까, 손님 다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하는, 지금 생각하면 만고에 쓸데없었던 걱정을 하면서.

나는 선인장도 죽이는, 초록 엄지손가락(Green thumb, 식물을 잘 키우는 사람이라는 의미)은 커녕 초록 새끼손톱도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던 것이다.


애호박은 수꽃만 피다가 덩굴이 시들어 버렸고, 깻잎은 미국 땅에 심어서 그런지 미국 애들처럼 위로만 크고 잎이 넓어지지를 않아서 실패했고, 대파는 어째서인지 점점 가늘어져 쪽파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날씬해져 갔다. 상추는 여린 잎이 나는 족족 동네의 무법자 야생 토끼들에게 뜯겼다.

실패한 대파와 애호박 농사. 그리고 상추의 천적(!) 동네 야생 토끼

쑥쑥 잘 자라는 건 부추뿐이었다. 야들야들하지도 않고 향도 좀 있어서인지, 토끼들도 부추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잔디의 일종이라고 생각한 걸까? 이유는 모르지만 토끼들이 남겨 준 덕에 부추는 인간들의 몫이 되었다.

깨끗하게 씻은 부추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준비한다. 부침가루와 튀김가루를 1:1로 섞은 반죽에 부추와 새우를 듬뿍 넣고 기름을 골고루 두른 프라이팬 중약불에 얇게 부쳐 내면 맛있는 새우부추전 완성! 한국에 있을 때 어머니께 배운 맛있는 전의 팁은, 반죽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부추 사이를 살짝 연결시켜 주는 풀 역할 정도로만 사용해서 전이 거의 초록색으로 보이도록.



여기서는 어떤 것을 아주 기초부터 만들었을 때, “프롬 더 스크래치(From the scratch)”라고 한다. 새우는 알래스카에서 왔고 부침가루와 튀김가루는 아마도 노스 다코타나 캔자스 주의 밀밭에서 왔겠지만, 부추는 정말 씨앗부터 심어서 가꾸었으니 “프롬 더 스크래치 부추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프롬 더 스크래치 부추전”을 부칠 때마다 아, 내가 지금 텍사스에 살고 있구나, 하는 실감이 든다. 배관공도 가전제품 A/S 기사도 요리사도 미용사도 농부도 우리 부부가 조금씩 나누어서 하고 있는, 부추전을 먹으려면 부추를 심기부터 해야 하는 텍사스에.


아, 그리고 변함없이 한인마트 채소 코너도 종종 애용하고 있다. 조금 멀고 내가 원하는 채소가 없는 날도 많지만, 한인마트 채소 코너는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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