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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 크림 파스타

붇지 않은 면을 먹는 사치

by 앤지

둘째를 낳고 1년 정도만에 복직을 한 날, 팀장님이 물었다.

"자, 회식은 며칠 내로 할 거고. 일단 오늘 점심은 뭐 먹고 싶어?"

망설임 없이 나는 "파스타요."라고 했다. 소고기라든가, 내가 휴직한 사이 오픈한 광화문 쪽 '힙한' 음식점들에서 파는 메뉴를 말할 줄 알았던 팀장님은 의외라는 듯이 왜 하필 파스타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붇지 않은 면이 먹고 싶어요."


어린이집에 아직 가지 않는 만 3세와 0세 아이 둘을 데리고 집에 있으면서 제 때 제대로 된 끼니를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남편은 당시 해외 발령 중이었고, 나는 아직 아이들이 너무 어린 데다 내 일을 그만둘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아 남편을 따라 나가지 않고 친정엄마 근처에서 '버티고' 있었다. 엄마가 거의 하루에 한 번 꼴로 들여다봐 주셨고 주 2회 오시는 가사도우미도 계셨지만, 집은 늘 개판 오 분 전, 나는 늘 거지꼴이었다. 누가 사다 준 빵이나 밥과 밑반찬만 겨우 꺼내 하루 한 두 번 그야말로 '에너지 공급'의 목적으로 먹는 게 일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은 하나도 빠지지 않아 복직할 때 입을 옷이 없어 속상했던 것까지는 여기서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자.) 아이들이 운 좋게 동시에 낮잠에 들었을 때 설레는 가슴을 안고 라면을 끓였다가 둘 중 하나, 혹은 두 아이가 다 깨어서 먹지도 못하고 버린 적도 여러 번, 제대로 된 면 음식을 제시간에 먹어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일 년 여만에, 누구의 음식도 먹여주거나 챙겨줄 필요 없이 각자 알아서 먹는 어른들끼리의 파스타는 그야말로 황홀했다. 프랜차이즈 음식점의 평범한 크림 파스타였지만, 그날만큼은 몇 성급 호텔에서 먹는 셰프의 파스타로 느껴질 만큼 맛있었고 가게의 분위기도 너무 우아하다고 느꼈다. 너무 맛있다고, 이렇게 편안하게 면을 먹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고 연신 감탄하며 파스타를 먹던 나를 조금 짠하다는 표정으로 보던 그때 팀장님의 얼굴이 생각난다.



여기 온 후로는 아무래도 한국에 있을 때보다 파스타를 자주 먹는다. 마트에 가면 파스타 면의 종류도 많고 매우 저렴한 데다, 간단히 붓고 고기나 채소만 더하면 완성 수 있는 시판 소스의 종류도 많아 '만만하기' 때문이다. 파스타를 흔하게 먹고 자란 세대가 아니어서인지,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에 비해 완성해 놓으면 상당히 근사해 보인다, 싶은 것도 파스타를 자주 요리하는 이유의 하나이다.

토마토 파스타는 시판 소스를 사용하지만, 크림 파스타는 시판 소스 대신 이웃이 "슈퍼 이지(Super easy)"하다며 가르쳐 준 레시피로 만들기도 하는데, 그렇게 만든 치킨 크림 파스타가 둘째의 "페이버릿(Favorite) 파스타"이다.

채소는 시금치, 양파, 아스파라거스 등을 사용한다.

큰 냄비에 면을 삶는다. 파스타면은 우리 소면과는 달리, 소금 약간과 기름을 몇 방울 떨어뜨린 물에 삶아준다. 알 덴테(Al dente, 면 가운데가 살짝 덜 익은 느낌이 나는 정도로 삶기)가 파스타의 정석이라고는 하나 우리 가족은 푹 익은 면을 좋아한다. 면이 원하는 만큼 익으면 건져놓고, 삶은 물은 버리지 않는다.

깊은 팬에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닭안심이나 가슴살을 살짝 굽는다. 이때 마늘 가루, 후추, 소금 약간을 뿌리고 오레가노 같은 허브가 있으면 더해줘도 좋다. 이웃은 마늘 가루를 살짝 뿌리는 레시피로 가르쳐 주었지만, 나는 한국인이니까 다진 마늘을 듬뿍 투하한다. 닭고기가 80% 정도 익으면 접시에 꺼내 두고, 그 기름에 채소를 볶는다. 생크림을 붓고 삶아 둔 면을 넣는다. 꺼내 두었던 닭고기도 다시 넣어 재료들끼리 잘 섞어준다. 너무 뻑뻑하면 면 삶은 물을 한 국자 붓는다. 간은 소금으로 한다.

나는 요리하다 생크림이 모자라면 급한 대로 우유를 좀 사용하기도 하는데, 우유가 많아지면 소스의 느낌이 묽어지고 먹을 때 면에 잘 안 묻는 단점이 있다. 그럴 때 혹시 집에 파마산 치즈 가루가 있다면 넉넉히 뿌려주면 좋다. 마지막에는 통후추를 샥샥 갈아서 뿌려 마무리.


어지간한 음식은 이제 더 이상 잘게 잘라줄 필요도, 후후 불어 식혀줄 필요도 없이 스스로 포크나 젓가락을 사용해 야무지게 파스타를 먹는 아이들을 보며,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기' 세계 1위인 나는 세월을 실감한다. 붇지 않은 면을 먹는 게 소원이고 심지어 '사치'로 느껴지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 파스타가 '만만한' 음식이 되다니.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이런 것이려나.



여담으로, 나는 그날 회의 전에 급히 양치를 하러 가면서 후배에게 "ㅇㅇ씨, 저 잠깐 치카치카 좀 하고 올게요! 회의 시작 전에 돌아올 거예요!"라고 해서 그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내가 휴직한 사이 팀에 들어온 그는 내가 카리스마 있다고 들었다는데(누군가 대단히 잘못된 정보를 주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더욱 나의 '치카치카'(심지어 나는 말해놓고 내가 유아용 단어를 썼다는 사실조차 몇 초 동안 자각하지 못했다)가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고 한다. 그는 지금 콜롬비아에 살고 있고, 더 이상 사내에서 부르던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지 않지만 여전히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다.

언니, 치카치카하셨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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