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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국수

'야매'여도 진심입니다

by 앤지

“여름이니까~ 아이스커피~ 여름엔~ **아이스!"

수년 전 모 믹스커피 광고에 나온 이 노래를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당시에는 꽤 히트였는데.

나는 이 노래를 혼자 이렇게 바꿔 부르곤 했다.

“여름이니까~ 콩~국수~ 여름엔~ 콩국수 먹기!"

매우 '아재'스럽다. 알고 있다. 그러니까 절대 크게 부르는 일은 없다. 하지만, 그런 노래를 흥얼거릴 만큼 나는 콩국수에 진심이다.


나는 여름이면 시장에서 콩국물을 사다 냉장고에 쟁여놓고 마시고, 콩국수를 챙겨 먹는 집에서 자랐다. 상당 부분 아빠의 취향이자 의지였는데, 이것들을 먹지 않고 지나가는 여름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대학생 때는 한 시간에 버스가 한 대 지나가는 곳에 있는 콩국수 맛집을 찾아가서 친구랑 7천 원 하는 콩국수 두 그릇을 먹고, 집에 오는 버스를 기다리다 지쳐 25,000원어치 택시를 타고 돌아온 적도 있다. 그때 친구와 내가 아까워했던 것은 택시비가 아니라, 괜히 버스 기다리느라 아까 먹은 콩국수가 이미 소화되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냥 진작에 택시 탈 걸, 맛있고 배부른 기분으로 집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내가 다닌 회사 건물에서 족히 20분 이상 걸어가야 하는 시청역 근처의 유명 콩국수 집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몇 번쯤은 왕복으로 택시비를 썼고, 점심시간 시작 한참 전에 사무실을 살짝 빠져나가는 것도 일 년에 한 번쯤은 감행했다.


비리지 않고 진하기만 하면 콩국수는 다 좋아하지만, 굳이 고른다면 검은콩보다는 백태, 씹는 느낌이 있는 쪽보다는 부드러운 국물을 선호한다. 부모님의 고향 지역은 설탕을 넣는다고 블로그 등에서는 이야기하는데, 실제로 우리 가족과 친척들은 대체로 소금 파이다. 나는 콩국수를 먹을 때는 위에 얹어진 고명 외에는 김치도 잘 곁들이지 않고 오직 콩국수만 먹는다. 김치의 양념이 콩국물에 섞이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텍사스에 와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음식이 바로 이 콩국수였다. 어지간한 한식은 재료를 사다가 내 손으로 해 먹는 것에 익숙해졌는데, 집에서 콩을 불려 얇은 껍질을 다 벗기고 비린내 나지 않게 잘 삶아 콩국물을 만들자니 일이 커도 너무 컸기 때문이다. 얼큰하거나 달달한 양념으로 어느 정도 맛을 보장할 수 있는 요리들과는 달리, 삶은 콩의 맛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요리라 자신이 없기도 했다.

한식당 중에 간혹 콩국수를 파는 집도 있긴 했는데, 다른 메뉴는 그래도 여차하면 사 먹기도 했지만 콩국수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콩국수를 전문으로 하는 집에서도 콩국물을 '맛있게' 만드는 것은 둘째 치고, 매일같이 만들어 상하지 않게 관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백만 스물한 가지 메뉴를 다루는 텍사스의 한식당에서 콩국수를 만든다니,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크게 신뢰가 가지 않았다.


나는 여름이면 냉면보다 콩국수가 생각나는 사람인데, 일 년 중 8개월이 여름인 텍사스에서 콩국수 없이 살기는 너무 아쉽고 힘든 일이었다.

진짜 콩을 한 번 사다가 삶아 볼까, 하는 생각이 들던 차에 남편의 한국 출장이 잡혔다. 콩국물을 사 올 수는 없겠지만 혹시나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해서 이*트 온라인몰을 검색해보니 '콩국물 가루'라는 것을 팔고 있었다. 이것을 물에 잘 녹여 풀기만 하면 콩국물이 된다는 꿈(!)의 가루였다. 내가 오매불망 먹고 싶었던 것은 콩을 갈아 만든 '정통' 콩국수였지만, 일 년 넘게 콩국수를 먹지 못한 상황은 '그래도 한국에서 파는 건데, 정통의 맛을 잘 구현했을 거야.’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밑져야 본전인데, 뭐라도 시도해 보자.

남편에게 돌아오는 길에 이*트에 꼭 들러서 그 가루를 가능한 한 여러 봉지 사 오라고 했다. 해외 출장 선물로 콩국수 가루를 사 오라고 하는 아내는 아마 나밖에 없지 않을까. 신신당부를 하고 보니 미국 공항에서 마약 소지로 오해받는 거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잠시 들었지만, 다행히 남편은 별일 없이 집에 돌아왔다. 그때 이*트에 있던 전부였다는 콩국물 가루 세 봉지와 함께.

콩국물 가루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콩국수 없이 지낸 지난 일 년 여의 시간이 콩국수 맛에 대한 나의 기준을 관대하게 만든 것도 좀 있었을 것이다. 초지일관 소금 파였던 내 입에는 살짝 달았지만, 아이들은 더 좋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간편했다. 콩국수를 먹고 싶을 때 바로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



많아 보였던 세 봉지도 야금야금 사라졌다. 콩국수를 취급하는 이곳 한식당들도 아마 이런 가루를 사용하지 않을까 싶어 한인마트에 갈 때마다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업소용으로만 유통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동네 지점에는 없는 것인지, 여하튼 콩국물 가루를 찾을 수는 없었다.

이제는 진짜 백태를 사다 직접 삶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것인가, 그 가루 맛 정도면 한식당 콩국수도 나쁘지 않을 듯한데 가 볼까 고민하던 중, 우연히 한 레시피를 보게 되었다.

콩 없는 '야매' 콩국수! (1인분 기준)
두부 반 모, 두유 한 팩(190ml), 통깨 한 스푼을 믹서에 넣고 갈아주세요.
집에 남는 견과류가 있다면 통깨 대신 넣어주셔도 좋습니다.
소면에 부어 먹으면 끝!

‘두부랑 두유라면 한인마트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니 시도라도 해 보자. 심지어 계절도 상관없는 재료니까, 이게 맛있다면 정말 대박이야!’

이 레시피를 발견한 순간, 거짓말 안 보태고 내 귓가에는 헨델의 <메시아> 중 할렐루야가 울려 퍼졌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재료들을 사다 시도해 보았다. 면 삶기를 제외하고, 만드는 데 정말 10분도 안 걸렸다.

결과는 견과류도 깨도 필요 없이 좋은 콩만으로 진하고 고소한 콩국물을 만들어내는 콩국수 전문점들의 맛에 비한다면 80점.

하지만 여기는 콩국물도 팔지 않고 한식당이 한 시간 가량 떨어져 있는 텍사스의 소도시라는 점을 감안하면 100점.

게다가, 이것은 한국의 콩국물, 콩국수 애호가들에게도 크게 어필할 수 있는 점인데, '계절 상관없이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120점.

여러가지 '야매' 콩국수

콩국물 가루보다 덜 달고, 깨나 견과류의 가감을 선택할 수 있어서 나는 이 레시피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혹시나 하여, 콩을 불려 껍질을 벗기고 삶을 용기를 내지 못했다고 해서 콩국수를 향한 나의 애정이 실은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이 절대 아님을 밝혀 둔다. 다른 음식은 어지간하면 맛있게 잘 먹지만, 콩국수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이었기에 오히려 도전하지 못했었다. 드라마 대사처럼 말하자면, "너무 사랑해서 함부로 함께할 수 없었다"라고나 할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나갔나?)

그리고 두부도 결국 콩을 삶고 갈아서 만든 음식이니까, 만드는 순서가 조금 다른 새로운 방식의 콩국수 레시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쑥스러운 듯 '야매'라고 써놓으신 이 레시피 개발자가 누구이신지 몰라도, 혹시 만난다면 "이게 왜 야매인가요! 아니, 야매이면 좀 어떤가요! 당신은 어느 날 텍사스에 뚝 떨어진 한 콩국수 애호가를 살리는 큰 덕을 쌓으셨습니다."라고 꼭 전하고 싶다.


콩국수에 대해 내가 아직 풀지 못한 미스터리를 끝으로 이야기를 마치려 한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 혹시 답을 아는 분이 있다면 나에게도 알려주시면 좋겠다. 그것은 콩은 일 년 내내 저장 가능한 식품인데 콩국물이나 콩국수는 왜 여름에만 파는가, 하는 것이다. 콩국수는 여름에 먹기 '더' 좋은 음식이지 여름에만 먹을 음식이 아닌데. 정말 미스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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