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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호레스(Alfajores)

스페인어 수업 최대의 수확

by 앤지

미국에 오고 한동안은 아이들이 학교와 이 동네에 적응하는 것을 돕는 것 외에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반년 정도 시간이 흘러 아이들도 학교에 제법 적응해 가고, 이웃들과도 꽤 가까워지고, 학교 봉사활동으로 나도 선생님들이나 다른 학부모들과의 교류가 생기고… ‘안정되어 간다'는 기분이 조금씩 들기 시작하니,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어 졌다.

텍사스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무척 많은 주(州)이다. 학교에서 오는 안내문이나 공공기관, 마트, 약국 같은 곳에서도 스페인어가 병기(倂記)된 것을 쉽게 찾을 수 있고, 우리 아이들이 등록한 학교는 아니지만 주변 공립학교 중에 영어와 스페인어, 두 가지로 수업을 하는 바이링구얼 스쿨(Bilingual School)도 있다. 나의 옆집에도 베네수엘라에서 온 이웃이 살고 있고, 아이들의 학교 친구들 중에도 집에서 쓰는 언어가 스페인어인 친구들이 많아서 아이들도 한 두 단어씩 스페인어를 주워듣고 오곤 했다. 이런 환경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페인어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고, 한 번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어학원이 우리 집에서 한 시간 떨어진 곳에 있긴 했는데, 시속 65마일, 약 104km/h의 속도로 운전해 가야 하는 한 시간이라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저기 알아보니 집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강사분이 있었다. 주 3일은 시내에 있는 그 어학원으로 출근을 하고, 2일은 집에서 튜터링(Tutoring)을 하는, 루피타(Lupita)라는 멕시코 분이었다. 나는 데비(Debbie)라는, 나와 동갑인 첫째를 포함해 총 아홉 명의 자녀를 둔 분과 둘이 루피타 선생님의 가정 수업을 듣게 되었다.



수업은 퍽 재미있었다. 우리 셋은 ‘엄마’이자 ‘주부’라는 공통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아주 죽이 잘 맞았다. 멕시코의 유명한 사랑 노래, 드라마 장면을 이용해 수업을 하는 것은 기본, 수업을 빙자해 같이 멕시칸 식료품 가게에 가서 돼지고기 부위와 채소들의 이름을 스페인어로 익히기도 했고, 아르헨티나 식 만두라고 할 수 있는 엠파나다(Empanada) 집에 가서 음식 주문을 스페인어로 해보기도 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영어나 제2외국어를 배우던 학창 시절에 비해 스페인어 실력이 느는 속도는 영 느리고 스스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수업만큼은 정말 즐거웠다.

엠파나다 식당에서의 수업이 끝나고 주차장에서 인사를 나누는데, 루피타가 아까 계산대 옆에서 팔고 있던 과자를 나와 데비에게 한 팩씩 내밀었다.

“이건 남미식 쿠키 알파호레스(Alfajores)라고 하는 거야. 한 번 먹어봐. 이 집 거는 기성품인데, 수제는 더 맛있어. ”

집에 와서 열어 보니, 두 개의 납작한 과자 사이에 초콜릿 색 잼이 샌드 되고 하얀 슈가파우더가 뿌려진 예쁜 과자였다. 한 입 베어 문 나는 깜짝 놀랐다. 슈가파우더가 폭폭 날리면서 과자는 파사삭, 하고 가볍게 부서졌고 사이의 잼에서는 색깔과 달리 우유맛이 났는데, 감히 천상의 맛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였다. 한 팩에는 3개의 과자가 들어있어 봉지를 뜯을 때 ‘두 개는 아이들에게 하나씩 줘야겠다’ 했었는데, 아이들은 내가 이걸 받은 걸 모르잖아? 하는 치사한 생각이 확 들었다. 이성을 부여잡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아까 그 엠파나다 집에 더 사러 가면 되지. 이름이, 알파호레스? 그리고 다른 베이커리에서도 팔 지도 몰라. 아까 수제가 더 맛있다 그랬지? 이것보다 심지어 더 맛있다고?

집 근처에서 파는 사람을 검색해 구매한 수제 알파호레스

학교에 다녀와서, 내가 어마어마한 인내심으로 남겨 둔 알파호레스를 먹어본 아이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좋아, 당장 더 구매하겠어. 하지만, 구* 지도를 뒤져 근처 제과점을 몇 군데나 찾아가 보아도 알파호레스를 파는 곳은 없었다. 집에서 거리도 꽤 떨어진 엠파나다 집에 메인 메뉴도 아니고 계산대 옆의 알파호레스를 구매하기 위해 자주 가기도 그렇고, 한 두 번 정도 더 사 먹고 알파호레스는 점차로 잊혔다.



그러다 몇 달이 흐른 어느 날, 마을 커뮤니티 페이*북에 집에서 사업자등록을 하고 알파호레스를 만들어 판매하는 사람이 글을 올린 걸 보게 되었다. 오 세상에, 이 게시물을 보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이건 운명이야! 당장 페이*북 메시지로 주문 문의를 보냈다. 지름 1.25인치짜리 알파호레스 한 개에 $1. 두 더즌, 24개를 주문했다. 이틀 후 찾으러 오란다. (아.. 바로 살 수 있는 건 아니군요. 제 정신이 아직도 한국에 살고 있네요, 네..)

구매하면서 보관 방법을 물었더니 “실온에서 2주간 괜찮아요.”라고 하길래 그렇구나, 했는데 보관 방법 따위는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알파호레스는 다음날 오전에 모두 사라졌다.

2주 후, 알파호레스를 또 주문했다. 참다가 참다가 주문한 것이었지만 또 순식간에 사라졌다. 흠. 미국에 와서 외벌이가 된 후 처음으로, 식비 때문에 가정 경제에 파탄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직접 만들어 보자. 쿠키를 만들어본 적은 없지만, 엄청나게 어렵기야 하겠어?


구*에 How to make Alfajores라고 치자, 친절한 전문가들의 레시피가 여러 개 나왔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갖춰야 할 재료도 복잡하지 않았다. 아, 왜 진작, 알파호레스를 파는 제과점을 못 찾았을 때 내가 직접 만들 생각은 못 했을까. 그럼 그 몇 달 동안 알파호레스를 그리워만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뒤늦은 후회가 살짝 들었지만, 뭐, 지금부터라도 만들어 먹으면 되지.

쿠키를 찍는 틀이 없어 소주잔으로 찍어서 만든 첫 알파호레스는 모양은 좀 못생겼지만, 맛은 사 먹은 것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자기들도 함께 만들어서인지, 사 먹는 것보다 더 맛있다며 신나 했다.

40개 정도 되는 분량을 구웠지만 며칠 만에 다 먹고, 1주일 후에 또 구웠다. 그 사이에 아*존에서 쿠키 틀도 구매해서 이번에는 다양한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똑같이 맛있었지만 위아래 쿠키가 똑같지가 않아서 묘하게 더 못생긴 알파호레스들이 탄생했다. 그냥 소주잔으로 만들걸 그랬나.

여하튼, 나의 알파호레스는 어디다 내놓을 실력은 못 되지만, 가족과 함께 즐겁게 만들어 먹기에는 충분해서 만족하고 있다.



아 참, 스페인어 수업은 그로부터 몇 달 후, 루피타 선생님의 사정으로 더 이상 가정 레슨이 불가능해져서 중단되었다. 고속도로로 한 시간을 달려 어학원까지 왕복하기에는 나의 용기와 열정이 부족하여 고민하는 사이 코로나의 시대가 시작되어 버려, 지금 나의 스페인어 실력은 기초 단계를 배웠다고 하기 무색할 정도다.

하지만, 아무렴 어때. 스페인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남미에는 알파호레스라는 엄청나게 맛있는 쿠키가 있다는 사실을 배웠고, 심지어 만드는 방법까지 알게 되었으니, 스페인어 수업은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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